차일혁은 토벌작전 중 귀순해오거나 포로로 잡은 빨치산들 중에서 용감하면서 몸이 날랜 빨치산들을 부하로 삼았다. 차일혁은 그들 빨치산 부하들을 이용하여 토벌작전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김의택(金義澤) 전북 도경국장은 “이러다가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부대가 빨치산부대가 되고 말겠구먼.”하고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김 국장은 그런 차일혁을 마음속으로는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김 국장도 처음에는 차일혁이 생포하거나 귀순한 빨치산들을 부대원으로 편입시킨 것을 보고 처음에는 우려를 많이 했지만, 차일혁의 그런 방법이 오히려 작전을 통해 많은 성과를 내게 되자, 이후부터 김 국장은 차일혁이 그런 일을 보고하면 기꺼이 허락하게 됐다.
차일혁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채택하여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는 전법으로 커다란 전과(戰果)를 거뒀다. 차일혁의 부하가 된 빨치산들은 빨치산들의 전술과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빨치산들을 토벌하는데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차일혁의 부하가 된 빨치산들은 빨치산으로 활동할 때 대부분 악명(惡名)을 떨치던 자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차일혁의 부하가 된 후 빨치산을 토벌할 때 크게 쓰였다. 이렇게 모인 빨치산 출신의 부하들 중에는 별별 인사가 다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나름의 사연들을 갖고 있었다.
차일혁에게는 김용식 외에도 특별한 빨치산 부하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양희근과 이기봉이다. 양희근은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일 때 귀순해 왔다.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2명의 남녀 빨치산이 귀순해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여순 10·19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양희근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양희근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와 빨치산이 된 간호병이었다. 두 사람은 빨치산활동을 하면서 ‘사상적 동지에서 연인’으로 바뀌었다. 양희근은 ‘임치순’이라는 가명을 쓰며 3년간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 공로로 ‘북한 국기훈장 2급’까지 추서 받았던 골수(骨髓) 빨치산이었다.
그런 관계로 양희근은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과 함께 작전도 했고, 귀순할 무렵에는 이영회부대의 정찰대장으로 있었다. 같이 귀순했던 간호병(위생부)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6·25가 일어난 후 산에 들어와 빨치산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산속에서 남녀의 정이 깊어져 부하들과 함께 정찰을 나왔다가 부하들을 사살하고, 차일혁에게 투항했다.
차일혁은 그런 양희근을 김용식이 이끈 사찰유격대에 포함시켜 이후 빨치산 토벌에서 유용하게 활용했다. 양희근의 활약으로 차일혁이 지휘하는 무주경찰서는 하루 동안 빨치산 7명과 총기 6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세웠고, 이로 인해 차일혁 부대는 전라남북도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최고의 빨치산 토벌 기록을 세움으로써 신문에까지 보도됐던 적이 있다. 그때가 1951년 11월 상황이었다.
그 후 양희근이 소속된 사찰유격대는 전북 임실군당 전공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이기봉을 생포하게 됐다. 이기봉은 전라선 기습을 비롯하여 차량 습격, 살인방화를 자행했던 그 고장의 악질 빨치산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사찰유격대장인 김용식 경사가 생포한 이기봉을 사찰대원으로 편입시키자고 했을 때 차일혁도 그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차일혁은 이기봉을 통해 외팔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이상윤을 잡기로 했다. 이기봉이 없었으면 감히 생각지도 못할 작전이었다. 이때는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에서 임실경찰서장으로 전보(轉補)된 후였다. 당시 임실에는 외팔이부대장으로 알려진 이상윤이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차일혁은 임실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 어느 날 임실 면장과 함께 관내를 둘러보게 됐다.
차 안에서 면장이 차일혁에게 생포한 빨치산 이기봉을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차일혁이 차 뒷좌석에 카빈소총을 들고 앉아 있는 이기봉을 가리키자, 면장은 그 말을 듣고 그만 실신하고 말았다. 그만큼 이기봉은 임실에서 악명을 떨치던 빨치산이었다. 결국 차일혁은 이기봉과 함께 외팔이부대장을 유인하여 사살할 수 있었다. 이는 빨치산을 통해 빨치산을 잡는 차일혁의 작전이 주효했음을 확인시켜 준 하나의 성공적인 작전 사례였다.
차일혁은 1953년 5월 총경으로 승진한 후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영전할 때도 옛날 빨치산 출신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차일혁에 주어진 마지막 임무가 될 이현상과의 최후 결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차일혁이 불러들인 빨치산 출신 부하들로는 김용식과 양희근, 그리고 이기봉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차일혁과 호흡을 맞추며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보신병(保身兵) 유도수와 최순경이었다. 이들은 차일혁과 함께 산과 골짜기를 누비며 토벌작전을 수행했던 자들이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차일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는 부하들이었다.
차일혁은 제2연대장으로 있을 때 반공포로들로 편성된 618부대와 부대장 김명주(본명 김창순)를 부하로 받아들였다. 차일혁은 전투력이 뛰어난 김명주의 618부대와 빨치산 부하들로 편성된 수색대를 활용하여 이현상 토벌작전에 나섰다. 차일혁 총경이 지휘하는 제2연대가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을 사살할 때도 618부대와 이들 빨치산 부하들로 편성된 수색대의 역할이 컸다.
차일혁은 사찰유격대장으로 활약했던 김용식을 제2연대 수색대장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양희근과 이기봉을 조장으로 배치하여 이현상의 도주로를 압박하며 추격해 갔다. 빨치산 부하들로 하여금 빨치산 생리를 가장 잘 아는 빨치산을 토벌하겠다는 의도였다. 결국 이들 빨치산 부하들로 이루어진 차일혁의 수색대는 이현상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수색에 들어가 이현상을 사살할 수 있었다. 양희근은 이현상이 사살되자, “이현상이 틀림없다.”며 이현상의 신원(身元)을 확인해줬다.
그런 차일혁의 부하들을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괴롭혔다. 이유는 단순하면서 명백했다. 이현상 사살 후, 그 공을 가로채기 위해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차일혁을 모함하여 그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사령관 김종원(金宗元) 경무관은 차일혁의 부하들인 수색대장 김용식과 양희근 그리고 이기봉을 사령부로 호출해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
이에 차일혁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최후의 방법을 썼다. 차일혁은 자신의 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사령관실로 찾아가 “더 이상 부하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이현상 사살과 관련하여 어떠한 포상도 받지 않겠다.”고 일갈하고 나왔다. 차일혁은 부하들을 위해서 이현상 사살의 최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지 않았다.
양희근은 그런 일이 있은 후 차일혁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수색대와 함께 그때까지 남아 저항하고 있던 빨치산의 거물인 이영회를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양희근은 이영회가 의령경찰서를 습격할 때 그곳 경찰서장을 사살하고 빼앗아 간 오메가 시계를 기억하고 있었다. 죽은 이영회의 손목에는 의령경찰서장에게서 빼앗은 오메가 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었다. 그래서 양희근은 이영회를 죽였다는 증거물로 오메가 시계를 가지고 왔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군경을 괴롭혔던 빨치산의 거물인 이영회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차일혁의 빨치산 부하들이 차일혁을 위해 거둔 귀중한 결과물이었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대장을 마친 뒤에도 이들 빨치산 부하들을 챙겼다. 차일혁 자신이 챙기지 않으면 그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빨치산 부하들은 모두 아픈 상처가 있었다. 인간으로서 겪기 힘든 빨치산 생활을 오랫동안 했던 빨치산 부하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전쟁의 상흔(傷痕)에 시달렸다. 그 중에서도 양희근이 심했다. 양희근은 전쟁이 끝난 후 유난히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밤마다 악몽(惡夢)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양희근은 몸서리를 쳤다. 산속에서의 끔찍했던 추위와 배고픔의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그럴 때면 양희근은 술로 마음을 달랬다. 과음으로 인해 양희근은 결국 손이 심하게 떨리는 수전증(手顫症)에 걸렸고, 이로 인해 그는 고생을 많이 했다.
차일혁은 부임지마다 옛날 부하들, 그 중에서도 빨치산 출신의 부하들을 챙겨서 데리고 다녔다. 그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니 옛 부하들 간에 적지 않은 일화(逸話)들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양희근과 유도수에 관한 것이 많다. 양희근과 차일혁의 운전병인 유도수는 매우 친했다. 어느 날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가 군인들과 싸움이 붙었다. 수적으로 불리하게 된 두 사람은 경찰의 신분도 잊고, 그만 수갑을 놓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차일혁은 두 사람에게 기합을 줬다. 차일혁은 그들에게 “경찰에게 수갑이 제일 중요한 도구인데 이것을 놓고 비겁하게 도망쳤으니 경찰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크게 나무랬다.
그러자 축구선수 출신인 유도수는 재빨리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으나, 우직했던 양희근은 차일혁에게 호된 기합을 받게 됐다. 유도수는 양희근에게 미련하게 기합을 받았다고 놀려댔다. 그 다음날부터 유도수는 차일혁을 슬슬 피해 다녔다.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그런 것을 뻔히 알고도 모른 체 했다. 차일혁은 마치 그 일을 모두 잊은 것처럼 유도수를 평상시처럼 대해줬다. 그러자 양희근과 유도수 두 사람은 차일혁의 그런 대범함과 인간성에 다시 한 번 매료됐다. 두 사람이 차일혁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됐다.
양희근과 유도수 사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어느 날 차일혁에게 경찰서장용으로 새 지프차가 지급됐다. 그러자 유도수가 양희근을 지프차에 태우고 시험운전에 나섰다. 그러다 가로수를 들이받아 차의 왼쪽이 움푹 들어가 버리는 사고를 냈다. 서장의 새 지프차가 그 지경이 됐으니 큰일이 났다.
그들은 나름 묘책을 마련했다. 차일혁에게 사고 난 부위를 보이지 않고 감출 계획이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꼼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방법을 썼다. 다음날 아침 차일혁이 차를 타려고 하자, 유도수는 양희근에게 사고가 난 차량 왼쪽을 가리기 위해 왼쪽에 서 있으라고 했다. 사고로 망가진 부분을 차일혁이 못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아침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 오후 한 지방유지가 우연찮게 차일혁의 지프차를 타면서 차가 망가진 것을 발견하고, 차가 “왜 이렇게 됐느냐?”고 유도수에게 물었다. 당황한 유도수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면서 “오늘 안으로 정비소에 가서 고치려 한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차의 한쪽이 망가진 것을 본 차일혁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유도수 다운 행동이야.”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부하를 대하는 차일혁 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이 진해경찰서장을 중도에 그만두고 충남경찰국 경비과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때가 1956년 7월 상황이었다. 그때도 차일혁은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양희근, 유도수, 최순경, 김명주(본명 김창순), 김용식을 데리고 갔다. 그들 대부분은 빨치산 출신의 부하들이었다. 차일혁은 새로운 부임지로 갈 때마다 그들을 한 집안 식구처럼 데리고 다녔다. 차일혁이 충남경찰국 경비과장을 마치고 1957년 3월 공주경찰서장으로 갈 때도 예외 없이 양희근, 유도수, 최순경 등을 데리고 갔다. 차일혁은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순직했다.
차일혁은 자신의 마지막 부임지까지 빨치산 부하들을 데리고 다니며 챙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그만큼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 중에서도 자신보다 불우하거나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히 신경썼다.
유난히 인정이 많았던 차일혁은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빨치산 부하들에 대해서는 가족 이상으로 대하며 친절과 인정을 베풀었다. 그렇기 때문에 6·25전쟁을 전후하여 적인 빨치산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전투경찰은 차일혁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차일혁이 오늘날까지 뭇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