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은퇴) 이후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테니스의 스타 탄생이다. 정현(세계랭킹 58위·한국체대)이 자신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전 세계 1위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를 넘어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2위·스위스)와 꿈의 대결을 벌일 가능성을 높였다. 무대는 한국 선수 최초의 메이저 대회 4강이다.
정현은 지난 22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총상금 5500만 호주달러·약 463억원) 남자단식 16강전에서 조코비치를 3-0으로 꺾고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 대회 8강에 진출했다.
정현이 조코비치와의 맞대결에서 거둔 승리는 세계 언론도 깜짝 놀라 찬사를 보낸 사건이었다. 이번 대회 최대 이변으로 꼽힌다. 팔꿈치 부상 이후 복귀전에 나선 조코비치를 무너뜨린 것은 정현의 부인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호주오픈 대회 홈페이지는 “스타가 탄생했다”며 “게임에서나 가능한 멋진 샷들이 나왔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고 극찬했고, 로이터 통신도 “조코비치가 구사하는 샷을 빨아들인 정현이 파란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패배를 인정한 조코비치도 “정현은 어려운 순간에 빠질 때마다 믿기 어려운 샷으로 극복해냈다. 코트 뒤에 있는 그가 벽처럼 느껴졌다. 약점을 찾을 수 없었다”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정현은 조코비치를 꺾은 뒤 승리를 만끽했다. 당당히 하고 싶은 세리머니를 펼쳤다. 경기 중 환상적인 샷이 나온 뒤에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주먹을 불끈 쥔 채 강렬한 포효를 내뱉었고, 경기를 마친 뒤 코트에서는 코칭스태프와 가족을 향해 큰 절을 올리기도 했다. 평소 멋진 코트에서 승리 세리머니로 준비했던 퍼포먼스였다. 또 공식 인터뷰를 마친 뒤 방송카메라에 ‘캡틴, 보고 있나?’라고 한글 사인을 남겼다. 삼성증권이 해체된 뒤 마음고생을 했던 전 삼성증권 김일순 감독에게 보낸 위로의 메시지였다.
정현의 스타 탄생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진운도 좋다. 정현은 24일 열리는 8강전에서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을 상대로 4강 진출의 또 다른 역사에 도전한다. 샌드그렌은 8강에 진출한 8명의 선수 가운데 가장 랭킹이 낮은 선수다.
하지만 샌드그렌도 만만치 않은 이 대회 돌풍의 주역이다. 정현이 3회전에서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를 3-2로 꺾고, 조코비치를 넘은 것처럼 샌드그렌도 2회전에서 스탄 바브링카(8위·스위스)를 3-0으로 제압한 뒤 16강에서 도미니크 팀(5위·오스트리아)을 3-2로 이기고 생애 첫 메이저 대회 8강 무대에 섰다. 두 이변의 주인공이 맞대결을 벌이게 된 셈이다.
객관적 기량으로는 정현이 샌드그렌을 앞선다. 둘은 지난 9일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ASB클래식에서 한 차례 맞대결을 벌여 정현이 2-1로 이겼다. 경험도 정현이 더 많다. 샌드그렌은 이 대회에서 메이저 대회 단식 본선 첫 승리를 거둔 무명에 가까운 선수다. 정현이 현재 페이스로 8강을 치른다면 무난히 4강 진출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대다.
정현이 4강에 오르면 세계가 주목하는 명승부가 예상된다. 정현이 승리할 경우 다음 맞상대는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20위·체코) 대결의 승자다. 페더러는 지난해 이 대회 챔피언이다. 이변이 없는 한 페더러의 승리가 유력하다.
정현은 페더러와 한 번도 맞대결한 적은 없다. 정현의 우상은 조코비치뿐이 아니다.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1위·스페인)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바라보며 테니스 선수의 꿈을 키웠다. ‘테니스 황제’와 메이저 대회 4강에서 당당히 맞서는 그 꿈의 무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