莫言此日松低塔(막언차일송저탑) 오늘 솔이 탑보다 낮다고 말하지 말라
松長他時塔反低(송장타시탑반저) 솔이 자라 언젠간 탑이 되레 낮으리니
정인홍의 <영송(詠松)> 중
겨우 한 자 남짓 되는 소나무 옆에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에 더욱 왜소해 보이는 소나무.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하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 높고 근사한 탑이 시선을 앗는 순간에도 소나무는 조금씩 생장한다. 결국 ‘길다’, ‘짧다’의 가치는 그 대상이 거쳐 갈 시간과 놓인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사실 이는 난해한 진리도, 새로운 깨달음도 아니다. 알면서도 번번이 눈과 마음에 속을 뿐이다. 작년보다 훌쩍 자랐음에도 우리 아이의 키는 늘 작아 보이기 십상이며, 친구에 비해 성적도 마뜩잖다. ‘모자람’에 취해 사니 생장의 행간을 읽어낼 여유도, 도리도 없다.
소나무가 나이테를 늘려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계절의 갈마듦과 비바람은 공히 자양분이 된다. 나무도 이러한데 사람이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이들에게도 기다림의 시간들이 절실하다.
방학이란 말이 무색하게 분주한 요즘 아이들이다. 자녀의 꿈에 자신의 욕망을 얹는 부모들 덕분이리라. 아이의 성향은 무시한 채 한 길로만 가닿는 모습은 충분히 씁쓸하다. 하지만 온갖 신산(辛酸) 다 겪어도 자식에겐 고단한 삶을 물려줄 수 없다는 부모의 바람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또한 자녀에게 궁극의 나침반이 되어 주는 부모들도 무수하다.
하여, 오늘도 필자 홀로 <논어>의 ‘반구저기(反求諸己, 잘못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를 되새길 따름이다.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시간을 주자, 기다려주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