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Me The Money’ 외부자의 상징이 된 래퍼들이 꽤 있지만 ‘화나’는 그러한 래퍼들 중에도 특히나 사연이 깊은 래퍼다. 2012년 ‘Show Me The Money’의 첫 번째 시즌 방영 전 Mnet은 자사에서 앨범도 발매한 적 있는 베테랑 래퍼 화나에게 “아마추어 참가자로 출연해달라”고 섭외했다가 거절을 당한다. 게다가 이후에도 화나가 2015년 시즌 4에서 프로듀서로 섭외되었다가 촬영 직전 일방적으로 교체되었다는 사실, 그가 사비를 털어 복합문화공간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순수 신인 뮤지션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나는 ‘Show Me The Money’의 대외적인 안티 테제가 된다.
그렇게 방송의 도움이나 대단한 홍보 없이도 많은 기대와 기다림을 낳은 올해 그의 세 번째 정규작은, 화나 랩의 대표적인 특징인 라임(rhyme)에 대한 강박과 비열하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성별을 착각할 만큼 강렬하게 째어지는 톤이 살아 있다. 라이밍에 대한 천착이 촌스럽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작금에도 화나의 그것은 시대적 정체이기보다 나름의 발전된 것으로 유려한 흐름을 들려주고,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앨범 전체의 감정선과 블루지한 리얼 연주를 통해 딱딱한 감상을 상쇄한다. 더욱이 래퍼 특유의 지난 성과의 회고나 자기만족식의 스왜그(swag)를 넘어 후대를 뒤받칠 힘을 원하는 타이틀곡 ‘POWER’의 가사는 씬의 선배로서 그가 내뱉는 메시지의 방향과 무게가 다른 이들과 완전히 다름을 증명한다.
화나 ‘POWER’
한편 지난봄 두 번째 정규앨범 ‘ㅂㅂ’을 발표한 TFO는 프로듀서 ‘사일러밤(Sylarbomb)’과 래퍼 ‘B.A.C.’로 구성된 듀오로서, 결코 방송에 적합하지 않을 법한 어둡고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을 팀의 주된 정체성과 기조로 삼는지라 멤버 1인이 돋보일 수도, 듣고 난 뒤 쉽사리 잊혀질 수도 없는 팀이기도 하다.
TFO의 음악은 사일러밤이 주조하는 비트가 1차적인 배경을 이끈다. 한두 가지 리프나 멜로디 아이디어로 루프를 반복해 그 위에 어떤 랩을 얹어도 괜찮을 적당한 리듬감을 타협하는 범상한 비트 메이킹과 다르게, 시종일관 종횡무진하며 자극적이고 변칙적인 순간을 창조해내는 사일러밤의 프로덕션은 B.A.C.의 개성 있는 랩과 요란한 불꽃을 튀기면서도 그것을 방해하기보다 더욱 돋보이게 한다. 비트 그 이상을 해내는 것은 B.A.C.와 참여 래퍼들의 몫이다. 앨범 직전 짱유와 함께한 노래 ‘Subliminal’에서 랩을 단지 사운드 장치의 도구로 소비시킨 것과 달리, 본 앨범에서는 잘 짜인 사운드 연출 위로 보다 변화무쌍한 랩을 연기해 때로는 비트와 유리된, 때로는 비트와 부합하는 이질적인 조화로 흥미로운 몰입의 시간을 만든다. 전작과 대조해 유독 날이 선 가사와 독한 은유는 대안으로서의 그들 음악과 훨씬 어울리는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https://youtu.be/c9Q-lV1yguI
TFO ‘원뿔’
8월 31일 세 번째 컴필레이션을 발매한 ‘리짓 군즈’는 현 대한민국 힙합 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정체성의 ‘크루’로서 소개하고 싶은 팀이다. 이미 ‘Show Me The Money’에서도 소속사 중심의 혹은 크루 중심의 여러 공동체가 등장했지만, 리짓 군즈는 공동체를 묶어내는 결속 도구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강력한 ‘즐거움’과 ‘느슨함’을 앞세운다. 모두가 자극적인 가사, 그럴 듯한 메시지, 해외의 스타일 혹은 대중적인 트렌드에 경도되어 있을 때 이들은 오롯이 단출한 일상과 긍정적인 정서로 부분보다 나은 합을 드러내 그만의 개성 있는 분위기를 자랑한다.
구체적인 동시에 함축적이기도 한 언어의 이중성을 어느 쪽으로도 과용하지 않는 리짓 군즈의 자유분방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는 음악적으로도 훌륭한 본 결과물이 자생적으로 제작되고 생산되었다는 점을 통해 더욱 가치를 발한다. 스스로 즐기는 수단으로서의 순수한 음악이 거대한 체계 밖에서 살아남는다는 희망의 양태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Money’가 아니라 ‘Life’ 그 자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