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30] 왜 전쟁을 선택했나? ①

2017-08-2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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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내부 다지는 데 보낸 5년
대몽골제국이 탄생한 이후 5년 가까이 칭기스칸은 내부를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행정체계와 군사제도 정비 그리고 법령의 정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진 = 나담 경기장 관중들]

대몽골 제국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추진한 또 하나의 작업은 아직 손안에 들어오지 않은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흡수시키고 달아난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해 후환을 없애는 일이었다.
대몽골제국이 탄생한 그해, 제베는 西나이만의 부이룩칸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다.
매사냥을 하고 있다가 붙잡힌 부이룩칸은 처형당하고 나이만부는 완전히 몽골 땅에서 사라졌다.

▶ '숲 속의 사람들' 잇단 귀순
이듬해인 1207년부터는 몽골 북쪽의 부족들을 복속 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곳에 대한 출정은 큰아들인 주치가 맡았다. 주치는 먼저 바이칼호 근처에 살던 키르키즈족을 복속시켰다.
 

[사진 = 카라코룸의 돌 거북]

17-18세기, 몽골 초원과 지금의 중국 신강 지역을 장악하고 이름을 떨쳤던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의 근원이 되는 오이라트족도 1208년 같은 방법으로 몽골의 진영 안으로 들어 왔다.
바르군, 우르수드, 칸가스, 투바스 등 몽골 외곽의 숲에서 살던 소수부족들도 주치軍을 만난 뒤 잇따라 귀순의사를 밝혔다.

'숲 속에 사는 사람들'로 불리었던 이들을 전투도 치르지 않고 대거 귀순시킴으로써 주치는 아버지 칭기스칸으로부터 큰 칭찬을 들었다.

"내 아들들의 맏이, 너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먼 길을 무사히 가서 인마(人馬)를 상하지 않고 숲 속의 사람들을 대거 귀순시키고 왔다. 그 백성들을 네게 주겠다."

▶ 브리야트족의 귀순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귀순한 '숲 속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브리야트족도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브리야트족은 현재에도 그 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 몽골 국경 넘어 러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종족이다.

[사진 = 몽골의 산림지대]

브리야트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것은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의 산물이다.
이후 브리야트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강력히 막으면서 몽골인으로서의 전통과 관습을 지켜가려고 노력했다.

특히 20세기 들어 몽골과의 통일을 여러 차례 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3년에 브라야트 몽골 자치공화국이 세워지고 그 30년 뒤에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빠지면서 브리야트 자치공화국이 들어섰다.
소련이 무너진 후인 1991년 10월에는 브리야트 독립 공화국이 선포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세계로의 대장정 기치
몽골의 여러 부족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유목민들이 칭기스칸의 그늘 아래로 찾아 들면서 칭기스칸의 지배권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칭기스칸은 바깥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나중에 이른바 세계 정복 전쟁이라고 부르는 대장정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다.
몽골의 정복 전쟁은 칭기스칸代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로 이어지면서 당시 지구촌의 절반 이상을 손에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진 = 만리장성 공격]

왜 몽골은 마치 전쟁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는 종족처럼 한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히면서 확대돼 갔을까?
이 흥미로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과 학설이 난무한다.

▶ 기후 건조 주기설
몇 백 년 만에 유라시아 지역에 극심한 건조기가 밀어닥쳐 메마른 초원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 유목민들이 주변의 농경 지역을 공격하게 됐다는 기상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이른바 '기후 건조주기'설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사진 = 초원의 양떼]

또 남쪽의 정착 민족과 북쪽의 유목 민족에게 각기 흥망성쇠 주기가 있어 북쪽의 흥성기와 남쪽의 쇠약기가 서로 일치한 때 유목민족이 주도하는 정복 전쟁이 일어나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이 같은 주장은 흥미로운 학술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 일체감 조성․물자확보가 주 목적
보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잡다한 여러 종족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통합국가가 초기에 지니게 되는 취약점을 보완하고 충격 요법을 통해 전체 구성원의 일체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동원했다는 주장이 그 하나다.

[사진 = 칭기스칸 초상화]

또 다른 하나는 칭기스칸의 정복 전쟁을 경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물자 부족과 유목민의 약탈 습성화가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보면 이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복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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