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유진희 기자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도시바 메모리 인수에서 승리, ‘인수·합병(M&A) 전문가’라는 명성을 재확인 했다.
최 회장은 1994년, 아버지 최종현 회장 체제에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를 일궈내면서 M&A에 눈을 떴다. 최 회장은 1998년 회장에 오른 이후에는 인천정유(2006년, 현 SK인천석유화학)를 비롯해, 하나로텔레콤(2008년, 현 SK브로드밴드), 하이닉스(2012년, 현 SK하이닉스), 바이오랜드(2016년, 현 SK바이오랜드), OCI머티리얼즈(2016년, 현 SK머티리얼즈), LG실트론(2017년), 다우케미칼의 에틸렌 아크릴산(EAA, 2017년) 등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이들 인수기업 가운데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는 SK그룹의 3대 사업 포트폴리오(석유화학·이동통신·반도체)을 이루는 그룹 최고 핵심기업이다.
최 회장은 M&A를 할 때 통 큰 베팅을 과감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인수 기업의 현재 가치보다 인수후 어느 정도 회사가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더 본다는 것이다. SK그룹에게 기업을 매각한 이들이 가격에 만족스러워 하다가도 수년 후 이에 몇 배로 가치가 커지자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에 임하는 최 회장의 자세는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행동을 드러내지 않고 물밑작업에만 집중했다. 인수전 후반까지 3조엔(한화 약 30조원)을 제시하며 미국 애플과 아마존 등을 지분 투자자로 끌어들인 대만 홍하이정밀공업의 공세와, 3자 매각을 반대한다며 소송을 건 도시바 메모리 합작사인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의 발목잡기가 부각 되면서 SK하이닉스는 유력 후보군에서 제외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이 SK하이닉스에게는 호재였다. 여론의 초점이 두 진영에게만 맞춰져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 회장측은 전략적 제휴를 맺은 미국 사모펀드(PEF) 베인 컴퍼니를 앞세워 일본내에 한국기업 매각이라는 부정적인 여론을 무마시킨데 이어 일본 국부펀드인 산업혁신기구와 미국 사모펀드(PEF) 등이 주축이 된 ‘미·일 연합’과 극적으로 의기투합하는 묘수를 성사시켰다.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최 회장의 전략은 지난 4월 취재진들과의 만남에서 드러났다. 당시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에 도움이 되고 반도체 고객에게 절대로 해가 되지 않는 방법 안에서 도시바와 협업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알아보겠다”면서 “단순히 기업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을 넘어 조금 더 나은 개념에서 워치(예의주시)해보겠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들은 최 회장이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에 ‘느슨한 끈 전략’으로 임한 것이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SK가 독자적으로 인수했다면 도시바 메모리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그만큼 그룹 차원에서 무리수를 감행했어야 했다. 욕심을 버리고 실리를 찾는 전략을 세운 결과, 일본과 미국의 제휴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인수전 출자액 부담도 최소화 하면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부문 2위 기업을 잡았다는 것이다. 지분은 적더라도 한·미·일 연합 내에는 반도체 사업 경험이 있는 기업이 SK하이닉스 뿐이라, 인수 후 연합 대표 자격으로 도시바 메모리 이사진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협상 결과 웨스턴디지털까지 끌어들인다면 플래시 메모리 시장 선두주자인 삼성전자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전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36.7%였다. 2위 도시바(17.2%), 3위 웨스턴디지털(15.5%), 4위 SK하이닉스(11.4%) 등 3사 점유율을 합하면 44.1%로 삼성전자를 능가한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은 ‘나 혼자’라는 욕심을 버리고 ‘함께’를 내세운 덕분에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윈-윈하는 성과를 올렸다”면서 “경영 참여 제한 때문에 시너지를 낼 부분이 적다는 비난도 있으나 SK하이닉스와 도시바 메모리간 다양한 부분에서 제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