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문재인 정부도 피하지 못했다. 첫 국무총리 후보자 징크스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지난 10일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할 당시만 해도 국회 의결은 일종의 요식행위로 여겨졌다.
문 대통령이 비영남 총리 지명 약속을 지킨 데다 전남지사를 지낸 이 후보자가 국민의당 다수 의원들과 친분이 두터운 만큼, 국회 본회의 통과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초대 총리 인준을 고리로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하려는 집권당과 반대를 지렛대 삼아 국면전환을 꾀하려는 야당의 엇갈린 이해관계가 한몫한다. 현미경 검증은 온데간데없이 ‘묻지마식 의혹 덮기’와 ‘정략적 상처 내기’가 인사청문회 판을 휩쓸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JP, 175일 만에 통과··· 고건도 한 달 이상 소요
29일 국회에 따르면 문민정부 이후 총리 인준안이 정국의 태풍으로 떠오른 것은 국민의정부 출범 때인 1998년 2월이다. 인사청문회제도 도입(2000년 6월) 전이었지만,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DJP(김대중·김종필) 연립정부 구성으로 초대 총리 인준안이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당시 DJ는 충청권과 보수진영 몫으로 JP(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총리 후보자로 지명(1998년 2월 23일)했으나, 당시 충격의 대선 패배를 당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김 후보자의 5·16 쿠데타 가담 전력 등을 이유로 극렬히 반대했다.
6개월 가까이 총리 ‘서리’ 딱지를 떼지 못한 JP는 총리 지명 175일(1998년 8월 17일) 만에 가까스로 국회 인준을 받았다. DJ정부의 총리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상·장대환 총리 후보자 등이 위장전입 의혹으로 2002년 7월 31일과 같은 해 8월 28일 나란히 임명동의안이 부결돼 ‘총리 잔혹사’를 이어갔다.
인사청문회제도 도입 후 첫 희생양은 노무현 정부의 내각 2인자를 지낸 고건 전 국무총리였다.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 고 전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인 안정성을 채울 최적임자로 꼽혔지만,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북송금 특검법’ 도입을 연계하면서 지명 36일째인 2003년 2월 26일 총리 후보자 딱지를 뗐다.
◆MB정부 ‘한승수’ 난항··· 朴정권 땐 김용준 낙마
총리 인준안 처리가 정부조직법 개편과 엮이면서 표류한 경우도 있었다. 이명박(MB) 정부는 초대 행정부 2인자로 한승수 총리를 2008년 1월22일 지명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의혹과 더불어 통일부와 여성부 폐지 방침에 반발해 인준안 반대를 천명했다. ‘한승수 인준안’은 여야 간 끝없는 공방 끝에 지명 32일 만인 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MB 정부 3년차 땐 ‘세대교체 아이콘’ 김태호 당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거치고도 스폰서 의혹과 박연차 게이트 의혹 등으로 자진 사퇴했다.
박근혜 정부는 ‘총리 수난사’의 연속이었다. 2013년 1월 지명된 김용준 총리 후보자는 부동산 투기 의혹과 아들 병역면제 논란이 맞물리면서 초대 총리 후보자 중 유일하게 낙마하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김 후보자는 총리로 지명된 지 5일 만에 낙마했다.
이후 같은 해 2월 8일 지명된 정홍원 총리 후보자도 방송통신위원회 업무의 미래창조과학부 이관 문제 등 정부조직개편안이 화약고로 부상하면서 16일 동안 표류한 끝에 2월 26일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안대희·문창극·김병준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총리 수난사 이유에 대해 “대화와 소통보다는 당론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라며 “9년2개월 만에 정권교체가 된 상황에서 여야 모두 시간을 끌기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