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개봉한 영화 ‘더 킹’(감독 한재림·제작 우주필름·배급 NEW)은 그야말로 조인성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작품.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폼나게 살고 싶었던 태수(조인성 분)가 대한민국을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설계자 한강식(정우성 분)을 만나 세상의 왕으로 올라서기 위해 펼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 속에서 조인성은 박태수 역을 맡아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약 30여 년간의 현대사를 그려낸다.
“벌써 9년이 됐네요. 하하하. 영화 시나리오라고 더 꼼꼼하게 보고, 까다롭게 구는 건 아니에요. 사실 제대 직후 영화 ‘권법’을 시작하려고 했었는데 늦춰졌죠. 그 사이 드라마를 시작하게 되었고 대중들을 만나기까지 공백이 길어진 것 같아요.”
촬영 현장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 9년이라는 긴 공백기 동안 조인성을 괴롭혔던 갈증은 영화 ‘더 킹’으로 단숨에 해소됐다. “안 나온 만큼, 몰아서 많이 나오게 됐다”는 농이 허투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인성은 ‘더 킹’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어휴, 원이 없습니다. 104회차를 찍었으니까요. 하하하. 사실 그만큼 걱정도 컸어요.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야?’ 싶기도 하고…. 시사회 때는 ‘아,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전혀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던 상태인 것 같아요.”
건달에서 서울대생으로, 샐러리맨 같은 검사에서 권력을 쥔 상위 1%로 거듭나는 박태수의 모습은 자칫 ‘판타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조인성 역시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그는 태수라는 인물을 그려가며 “현실적 또는 만화적 표현법”에 관해 갈등했다.
“저는 영화적, 만화적인 표현법을 따르기로 했어요. 태수의 어린 시절이 (관객들에게) 호감을 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수가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잖아요. 관객들이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호감을 쌓는 게 중요했죠. 태수의 흥망성쇠를 속도감 있게 보여줄 수 있기도 했고요.”
그의 말마따나 관객들은 태수의 눈을 통해 30여 년간의 현대사를 바라본다. 우리 현대사의 계보와 비극을 관통하듯, 연기에 있어서도 어떤 ‘포인트’가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포인트가 필요할 것 같죠? 태수의 10대, 20대, 30대의 모습이 그려지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런 연기적인 포인트가 필요 없었어요. 왜, 친구들끼리 만나면 서로 나이든 걸 잘 모르잖아요. 저는 관객과 태수가 그런 사이가 되길 바랐어요.”
이야기를 끌어가는 단단한 힘과 새로운 연기법에 감탄하다 문득, ‘그래도 역시 가장 조인성답다’는 생각이 드는 감정 연기와 맞닥뜨렸을 땐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해졌다. 영화 중반, 전략부 행동대장 양동철(배성우 분)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는 신에서였다. 그는 특유의 섬세하고 정교한 감정 연기를 선보였고 9년간의 공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특유’라고 표현해주셨지만, 그에 대한 고민도 분명 있었어요. ‘내 연기에 대한 자기복제가 아닐까?’, ‘그냥 내 모습이 아닐까?’ 싶었던 거죠. 하지만 상대 배우였던 (배)성우 형 덕분에 독특한 분위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작고, 미세한 온도 차이가 있었거든요. 검찰청 안 외진 장소에서 변해버린 동철을 바라볼 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어요.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영화는 끊임없이 태수의 선택을, 변화를 짚어낸다. 실제 조인성 역시 ‘더 킹’을 통해서 “보편적이었던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바로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모두 실제에요. 당시만 하더라도 보편적인 시선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더 킹’을 찍게 됐고, 현 시국을 경험하게 되면서 감정이 바뀌었어요. 그땐 제가 무지해서 사실로만 받아들였지 ‘왜’라고 궁금해하지 않았거든요. 시국이 바뀌면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됐죠.”
조인성의 시각이 달라질 정도로 영화 ‘더 킹’은 현실과 데칼코마니(Decalcomanie)를 이루고 있다. 스크린에는 마치 현실을 찍어낸 듯, 똑 닮은 상황과 인물들이 지나가고 지난 30년간의 현대사를 빼곡하게 담아냈다.
“찍을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죠. 우리 입장에서는 ‘센스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있는데, 그게 현실이 돼버렸거든요. 예컨대 굿하는 장면이 그랬어요.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간다는 점이 풍자적이고 재밌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해 그게 합리적인 의심이 돼버렸죠. 당황스럽긴 했는데, 그런 몇몇 요소들이 오히려 또 다른 관람 포인트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그의 거침없는 발언이 통쾌하고, 속 시원했지만, 그와 더불어 조인성에 대한 걱정이 물밀 듯 일었다. 영화와 상식, 소신들로 인해 영화 제작사와 배우들을 걱정해야 한다니.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블랙리스트라니…. 거기에 오르는 건 그들의 문제겠죠. 만약 오른다고 해도 기자님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럴 거죠? (웃음). 더불어 관객들이 (저를) 지켜줄 거예요. 각자 정의롭게 살면서 공생해야죠. 정치적 이념과 생각이 다르다고 민주주의를 왜곡시켜서는 안 돼요. 촛불집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현재 시국을 찬성하는 건 아니니까. 누구나 마음속에 손대면 뜨거워지는 촛불이 있잖아요.”
“생각보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는 조인성은,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철저하게 분석, 연기적 스펙트럼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저는 연기에 있어서 공감과 제시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공감’이고, 영화는 ‘제시’라고 생각하죠. 드라마에서는 전형적이더라도 보편적인 마음을 다루고 있고, 영화는 그 장르가 다루지 못하는 걸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멜로 영화보다는 멜로드라마를 추구해요..”
어떤 일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조인성은 자신의 선택, 인식에 관해 “19년간 축적해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인성의 삶이 여실히 드러나는 ‘데이터’는 그가 사랑하는 작품, 인간관계, 스스로에 대한 성찰로 이뤄져 있었다.
“배우는 곧 상태에요. 영화는 곧 그 배우의 상태가 화면에 드러나는 거고요. 인간관계나 작품, 경험은 정말이지 ‘체험 삶의 현장’ 같아요. 최근 저는 숨 쉬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요즘 저의 화두죠. 다들 자신이 숨 쉬는 건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잖아요? 내 건강이나 호흡 같은 것들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숨 쉬는 걸 주의 깊게 볼 거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지낼 거예요.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면서 친구들과도 계속 술도 마시고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