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정등용 기자 =“내 두 손은 총을 들었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두 손 모아 기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소.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동양평화요”
어지러운 시국이다. 내부적으로는 민간인의 국정 농단 사태로 국민의 촛불 민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외부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의 제재가 한류 열풍에 직격탄을 가하고 있고,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역시 최고조에 달한 상태다.
국내 민주주의 리더십 붕괴와 복잡해진 한·중·일 외교 역학 관계 속에서 우리 역사를 통해 그 해법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문화 콘텐츠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역사와 힙합의 콜라보레이션 무대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인 한편, 현 시국을 풍자하기도 했다.
지난 18일 개막한 뮤지컬 ‘영웅’ 역시 이러한 큰 흐름 속에 있다. 이미 지난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일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한 후 여섯 시즌을 거치며 익숙해진 공연이지만, 오늘날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맞물려 그 의미는 남다르다.
‘영웅’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작품은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 현장을 고스란히 재현했을 뿐 아니라 그의 내면적인 고뇌와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그리고 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안 의사의 재판 장면이다. 안 의사는 이토를 살해한 것을 사과하면서도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열다섯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한다. 이 장면에 삽입된 넘버 ‘누가 죄인인가’는 안 의사의 카리스마와 함께 관객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추격 장면은 ‘영웅’의 또 다른 볼거리다. 특별한 대사나 노래는 없지만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무대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영웅’은 안중근의 삶에만 주목하진 않았다. 역사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평범한 이들의 모습도 함께 담아냈다. 비록 가상 인물이지만 명성황후의 마지막 궁녀 설희와 안중근의 친구 왕웨이, 왕웨이의 여동생 링링은 또 다른 ‘언성 히어로(승리의 숨은 공로자)’의 표상이다.
올해 처음으로 열린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뮤지컬 배우 정성화의 캐스팅도 완벽했다. 이미 2010년 공연을 시작으로 ‘영웅’ 안중근의 대표 배우로 각인된 정성화는 이번 공연에서도 절절한 감정 연기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특히, 사형을 앞두고 보인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두려움은 그가 영웅인 동시에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줬다. 어쩌면 영웅은 대단한 기질을 타고 나거나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비범한 인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연은 1월18일부터 2월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