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광저우, 기억을 음미하고 문화를 경험하는 도시

2017-01-17 17:45
  • 글자크기 설정

구불구불 이어진 주장이 천년 상업도시 광저우의 찬란함의 증인이다. [사진=광저우시 위원회 선전부 제공]


인민화보 톈제(田潔), 천커(陳克) 기자 = 광저우(廣州)는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의 3대 도시다. 중국 대륙 남쪽, 광둥(廣東)성 중남부에 위치한다. 기록이나 전설에 따르면 광저우는 ‘양청(羊城)’ ‘쑤이청(穗城)’이라고도 불렸다. 북방에서 온 ‘양(羊)’은 중원문화를 나타낸 것이고 ‘다오쑤이(稻穗, 벼이삭)’는 남방의 산물이다. 이는 옛부터 광저우인들이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수용한 포용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 남해안에 가깝고, 주장(珠江) 하류에 위치한 광저우는 옛부터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유리한 우세가 있었다. 황톈지(黃天骥) 중산(中山)대학교 교수는 “광저우 문화는 전통을 중요시하고 지켜나가는 일면도 있고, 외국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일면도 있다”면서 “개척과 혁신의 진취적인 정신과 실익과 상업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어우러져 있다”고 설명했다.

찬란했던 무역의 중심지
광저우성(廣州城)의 기원은 2200여 년 전 건설된 번우성(番禹城)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14년 진시황은 영남(嶺南)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광둥(廣東) 일대에 남해군을 설치, 군(郡)이 번우(현재의 광저우)를 통치하도록 했고 임효(任囂)가 남해 군위(郡尉)를 맡았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임효 수하의 조타(趙佗)가 중원에서 초(楚)와 한(漢)이 겨루는 틈을 타 기원전 203년에 남월국(南越國)을 세우고 수도를 번우로 정했다.
주장은 광저우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개방과 포용의 주장 문화와 해양 문화가 상호 융합되면서 광저우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넓은 가슴을 갖게 됐다. 한 무제는 광저우를 기점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원양 항해 무역을 시작했고 이때 개척된 항로가 해상 실크로드의 발단이 됐다. 기원 1세기 로마 상인이 광저우로 들어와 무역을 시작했다. 당나라 때 광저우는 중국 제일의 항구로 자리잡았다. 당 개원(開元) 시기 광저우의 상인 유동인구는 연인원 8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광저우 시관(西關)에는 스싼항(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좁은 골목이 있다. 양항(洋行)이라고도 불리는 이 일대는 청나라 정부가 지정한 대외무역 독점기관이 있던 곳으로 광저우 대외무역의 발전을 몸소 겪었다. 청 건륭(乾隆) 시기 조정은 쇄국정책을 펼쳤으나 광저우만을 유일한 대외 통상 항구로 남겨두었다. 당시 스싼항은 폐쇄된 중국 사회와 외부를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했고, 청 정부에 재원을 제공하는 ‘천자의 남쪽 창고’가 되어 걷어들이는 세금이 해마다 급증했다. 스싼항은 19세기 중엽 광저우를 세계 10대 경제 도시로 만들었고 거상을 탄생시켰다. 1840년 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패배한 청나라 조정이 영국과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광저우의 통상과 스싼항의 독점 특권은 취소됐다.
당시 주장 남안에 건설된 상업 건물과 창고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주장 양쪽에는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건축물이 아직 남아있다. 또 한쪽에서는 현대화된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주장 북쪽의 주장신청(珠江新城)은 중국의 3대 중앙상무지구 중 하나인 톈허(天河)CBD의 주요 부분으로 세계 500대 기업이 밀집해 있다.
 

버려진 공장을 개조한 훙좐창은 연인과 문예 청년들이 즐겨찾는 관광 휴양지로 자리잡았다.[사진=타마코 사도(Tamako Sado) ]

 

판시주자. 중국 다른 지역의 차 문화에 비해 광저우의 아침 차는 떠들썩한 가운데 가족간의 정과 온정이 나타난다.[사진=타마코 사도(Tamako Sado) ]

 

루드르성모성당(露德聖母教堂)은 웨딩사진의 성지가 됐다.[사진=타마코 사도(Tamako Sado)]


신·구의 조화, 본색과 활력의 만남
광저우를 방문하기 전 광저우에 대한 인상은 현대적이고 세련되며 트렌디하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광저우는 중국에서 구시가지를 가장 적게 개조한 도시 중 하나다. 광저우를 다니다보면 발전 여부와 상관없이 많이 개발하지 않은 ‘구시가지’를 만날 수 있다. 덕분에 이 도시의 ‘본색’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관’은 시 중심의 북쪽에 위치한 시촌(西村), 남쪽의 주장, 동쪽의 런민(人民)로, 서쪽의 샤오베이장(小北江)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성의 서문 밖에 위치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명청 시대 광저우의 상업무역 중심지였던 시관은 명문세족, 관료, 거상 등이 모인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들이 시관 일대에 호화주택을 대거 지었고 백성들은 이를 ‘시관다우(西關大屋)’라고 불렀다. 수백년 동안 광저우의 부자 동네였던 시관은 영남 문화의 정수가 뿌리 깊이 박혀있어 과거 광저우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꼭 들러봐야 한다.
시관다우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시관의 또 다른 건물인 치러우(騎樓)는 광저우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상복합 건물인 치러우는 19세기 말~20세기초 건축되었고 서양 건축과 영남 전통문화가 결합되어 변화한 것이다. 치러우는 비가 많이 내리는 광저우의 날씨를 잘 고려한 건물이다. 높고 넓은 복도는 비와 햇빛을 막고 진열하기도 좋아 장사에도 편리했다. 때문에 치러우는 광저우성 전체를 풍미했고 20세기 20~30년대 광저우 거리의 주요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잘 보존된 옛 도시 덕분에 광저우는 독특한 ‘본색’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본색은 낡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와 함께 발전하고 있는 광저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주장 북쪽에 위치한 위안(員)촌은 중국 최대의 통조림공장인 광둥통조림공장의 소재지였다. 50년대에 소련의 원조로 지어진 공장으로 이후 공장이 이사가고 버려져 낡은 공장과 녹슨 기계, 얼룩덜룩한 나무만 남았다. 2009년 창의력이 넘치는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번뜩이는 예술 영감을 발휘해 버려진 생산 공장을 로프트(Loft) 스타일의 예술 단지로 바꿔놓았다. 단지 내에 붉은색 벽돌로 만든 소련식 건물이 많고, 이 건물이 탄생한 ‘붉고 전문적인’ 시대를 기념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이 단지를 ‘훙좐창(紅磚廠)’이라고 이름 붙여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공장에 생기를 부여했다.
몇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훙좐창은 예술적 분위기에 힘입어 광저우의 문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고 광저우 시민에게 예술, 인문, 트렌드, 휴식이 하나가 된 새로운 도시 생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광저우에서는 훙좐창을 방문해보지 않고는 ‘트렌드 세터’라고 하거나 ‘문예에 조예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현대 도시인 광저우는 중국 젊은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운 생활방식이 이곳에서 꽃피었다.
광저우는 옛 도시의 본색과 새로운 공간의 활력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그러나 신구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병존, 광저우인의 차분함과 여유로움, 유유자적한 생활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 또한 광저우가 지닌 독특한 매력이다.
 

판시주자의 시그니처 디저트인 ‘시췌덩메이(喜鵲登梅)’와 ‘바이투셴샤자오(白兔鮮蝦餃)’. 샤몐 란구이팡의 다과인 ‘딩샹첸자오(丁香茜餃)’와 ‘간정사오마이(幹蒸燒麥)’[사진=타마코 사도(Tamako Sado)]


‘아침 차 한 잔’의 여유
광저우인은 차 마시는 습관이 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중 아침에 마시는 차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광저우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침의 차를 일종의 휴식 방식으로 여긴다. 온가족이 둘러앉아 삶의 즐거움을 나눈다. 친구들과 모이거나 차 마시는 것을 통해 차 친구를 사귀어 즐거움과 고민을 나눈다. 차를 마시면서 사업을 논하면 사업 상의 팽팽한 긴장감이 완화된다. 광저우인의 말에 따르면 아침 차를 마시지 않으면 목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날 하루 동안 심사가 어지럽다.
아침 차는 관음차나 보이차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는 조연일 뿐이고 각종 디저트, 음식, 죽이 주연이다. 차사오바오(叉燒包), 사오마이(燒麥), 창펀(腸粉), 펑좌(鳳爪), 눠미지(糯米雞) 등이 올라오고 찐 것, 지진 것, 삶은 것, 튀긴 것 등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광저우의 아침 차는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차 마시는 것을 ‘탄차(歎茶)’라고도 한다. ‘탄’은 한숨을 놓는다는 것으로 천천히 즐긴다는 뜻이다. 아침 차는 아침밥과 다르고 여유로운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광저우인들의 차 마시는 습관은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청나라 함풍(咸豐) 연간(AD 1851-1861) 때부터 시작됐다. 광저우에 문을 연 ‘일리관(一厘館)’이라는 음식점이 문 앞에 ‘다화(茶話)’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무 간판을 걸고 나무 탁자와 의자, 찻물과 간단한 다과를 제공했다. 손님들은 이곳에 잠시 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이후 조금 더 고급스러운 다관(茶館)이 생겼고 차 끓이는 것에 정성을 들이고 다과도 더 좋은 것으로 내놓았다. 찻집은 점점 규모를 확대해 이층으로 된 찻집인 다루(茶樓)로 발전했고 광저우인은 다루에서 아침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1947년에 문을 연 판시주자(泮溪酒家)는 오래된 노포로 근처에 ‘판시(泮溪)’라는 개천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양한 다과가 판시주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연령층의 고객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판시주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연구했다. 두리안, 겨자, 화용과 등의 재료로 다과를 만들었다. 다과 외에 이곳은 음식과 죽도 특색이 있다. 광저우의 대표적 죽인 ‘팅쯔저우(艇仔粥)’의 발원지는 판시주자 옆의 리즈(荔枝)만 일대다. 과거 광저우인은 리즈만에서 물놀이를 즐겼고 작은 배로 오가기도 했다. 그중 팅쯔(艇仔, 지붕이 있는 작은 배)에서 팅쯔저우를 제공했다. 죽에 생선살, 살코기, 유탸오(油條), 땅콩, 양파 등을 넣어 신선하고 맛있어 큰 사랑을 받았다. 시대는 변했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광저우인은 판시주자의 아침 차에 미각을 사로잡혔다.
(본 기사는 인민중국(人民中國)에서 전재했습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