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1-09 19:11
  • 글자크기 설정

1-1독립군 출신의 독보적인 대한민국 경찰

[사진: 아주경제 DB]

최근 한국 사회는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추진 등을 계기로 역사 논쟁이 가열되고 있고, 이는 보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진보 진영에선 해방 후 친일파가 처벌받지 않고 각계각층에서 권력을 잡은 것 등을 이유로 해방 후 우리 역사는 불의가 승리한 역사라고 비판한다. 이에 정부와 보수 진영은 해방 후 대한민국은 세계 최단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것 등을 근거로 들면서 진보 진영의 사관은 자학사관이라 반박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런 이분법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에선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친일경찰관들이 해방 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좌익 세력을 숙청했고 그 후예들이 독재정권들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충성했다고 하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 중에선 독립운동가 출신도 있었다.

 남정옥(사진)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최근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이라는 제목의 칼럼 모음에서 차일혁은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로서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지만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차일혁 경찰관을 소개하면서 더욱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해방 후 우리 역사를 볼 것을 당부한다.
 
제1부 차일혁은 누구인가?
1.  차일혁, 독립군 출신의 독보적인 대한민국 경찰
 

[사진: 차일혁 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1920-1958) 경무관은 독립군 출신의 독보적인 대한민국 경찰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군 출신의 경찰이 그만큼 없었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찰에 투신했던 조선인들이 광복 이후 미 군정기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경찰로 변신했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 경찰에 독립군 출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4만 명을 웃도는 경찰관 중 차일혁이 거의 유일한 독립군 출신의 경찰관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당시 남한의 국내 상황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청산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력혁명에 노출된 당시 남한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및 치안유지가 무엇보다 가장 우선시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독립군 출신의 차일혁으로 인해 대한민국 경찰은 민주경찰로서 그나마 체면 치례를 한 셈이다.

 독립군 출신의 차일혁의 역사적 평가는 대단하다. 6·25전쟁 영웅, 호국의 인물, 대한민국을 수호한 자유수호자 18인, 전투를 가장 잘한 빨치산 토벌대장, 대한민국의 후방을 안정시킨 전투경찰, 문화훈장을 받은 유일한 경찰 등이 그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한 인물이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굵직한 경력을 수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38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이룬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의 경력 중 돋보이는 것은 독립군 출신의 경찰관으로서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정통성 확립에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부가 독립운동에 수여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을 받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차일혁 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의 삶속에서 독립군은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다. 그가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성장하고 발전한 데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체득한 애국애족의 정신, 군사지식과 전투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1936년 16살의 어린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숱한 나날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오로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그는 때로는 한국전지공작대 대원으로서, 때로는 중국군 장교로서, 때로는 조선의용대 대원으로서, 때로는 항일 첩보수집을 위한 정보원으로서, 때로는 일본군에 직접 맞서 싸우는 항일 무장독립군으로서 싸우고 또 싸웠다. 차일혁은 이런 혹독한 시련과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경찰에 투신해 조국에 헌신했던 지조있는 애국 투사였다.

 차일혁이 독립군이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은 드라마틱하다. 홍성공업전수학교 2학년 때,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조선인 선생을 폭행하던 일본 고등경찰을 구타하면서 그의 길고 긴 독립군으로서의 고단한 삶의 여정이 시작됐다. 그때가 1936년이다. 당시는 일제의 만주진출이 정착되어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수립되고, 일제는 이를 발판으로 중국 대륙으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차일혁의 조국,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점차 동화되어가면서 일제의 중국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선은 거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일제고등경찰을 구타한 차일혁은 당장 일본경찰로부터 수배를 받게 됐다. 그는 국내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신하던 중 금강산에서 곤경에 처한 어느 귀부인을 구해주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집안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16세의 어린나이임에도 항일독립운동을 위해서다. 그곳에서 평생 스승인 김지강(金芝江)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체격이 크고 운동신경이 남달리 뛰어났던 차일혁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최적화된 ‘어린 청년’이었다.

 차일혁은 김지강 선생의 소개로 김구, 김원봉, 윤세주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된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김지강 선생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차일혁은 홀로서기에 들어갔다.

 차일혁은 한국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하다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중국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제대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지식과 전술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졸업 후 중국군 포병장교가 된 차일혁은 승진하여 중앙군 제1전구 제32사단 포병중대장으로 항일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서게 됐다. 이를 관망하던 차일혁은 조선의용대가 동포들이 많이 살던 화북지방으로 옮겨가자 중국군에서 나와 조선의용대 신병으로 입대한다. 박효삼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제9전구에 소속된 차일혁은 항일전선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조선의용대에서 차일혁은 소설가 김학철, 광복회장을 역임한 김승곤과 그의 사촌형 김일곤 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

 조선의용대에서 차일혁은 차철(車轍)과 차용철(車鏞徹)로 활동한다. 독립군들은 대체로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국내의 가족 및 친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광복군 참모장과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을 역임했던 김홍일 장군도 왕웅(王雄), 왕일서(王逸曙), 왕부고(王復高)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국군최초의 기마대대장을 역임하며 전쟁초기 전공을 세웠던 광복군 출신의 장철부(張哲夫) 중령도 가명을 사용했다. 그의 본명은 김병원(金秉元)으로 주월한국군 초대 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 장군과 육군사관학교 제5기 동기생이다.

 차일혁이 중국에서 싸웠던 전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투는 중국 팔로군 지휘부를 구한 태항산(太行山) 전투이다. 당시 일본군은 태항산 일대를 포위하고 20개 사단을 동원하여 공개를 전개했다. 이때 등소평(鄧小平) 등 중국 팔로군 지휘부도 있었는데, 그들은 조선의용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차일혁은 중국군 팔로군 포병사령관이었던 무정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당시 조선의용군 간부로는 일제 패망 후 북한에서 활약했던 박효삼, 최창익, 김두봉, 김창만, 이익성 등이 있었다.

 8·15광복 후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흘러갔으나, 차일혁은 홀로 남한으로 들어왔다. 9년만에 귀국한 차일혁은 풀려 난 김지강 선생과 함께 그때까지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던 일제 고등경찰 사이가 시치로(齋賀七郞), 츠보이(坪井岩松), 하라다(原田太六) 등을 처단했다. 이때 차일혁은 차리혁(車利革)으로 행동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수배를 받은 차일혁은 전주로 내려가 삼성제사 경비주임을 거쳐 노무과장으로 있으면서 회사 내에 침투해있던 남로당 계열을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전주로 내려간 그는 생애 마지막 이름이자 역사에 길이 기록될 ‘차일혁’으로 바꾸었다.

 이후 차일혁은 광복군총사령관을 역임한 지청천(池靑天)이 세운 대동청년단에 들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광복군 출신의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의 권유로 호국군 대대장과 청년방위대 총무처장 등을 거치며 청년활동 및 건군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대위 계급장을 달고 구국의용대를 지휘했으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이 점령했던 전북지역으로 미군에 이어 국군 제11사단 제13연대가 들어오고, 지역 내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가 창설되자 대대장에 임명되면서 경찰에 투신하게 된다. 그때가 1950년 12월 상황이다. 〈끝〉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