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도라’(감독 박정우·제작 (주)CAC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주)시네마파크·배급 NEW)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한반도를 위협하는 원전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배우 김남길(35)은 이번 작품에서 판도라 속, 혼란을 겪게 되는 철부지 아들 재혁 역을 맡아 연기했다. 어쩌면 재혁은 이제까지의 김남길이 보여준 인물들과는 다른 노선을 가졌다. 유연하고 동시에 뜨거운 인물. 김남길은 재혁과 ‘판도라’에 대한 애정과 괴로움들을 토해놓았다.
- 생각보다 잘 나왔다. 촬영 때는 정말 힘들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촬영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하하. 마스크도 쓰고 현장도 시끄러우니까 대사할 때 항상 소리를 질렀다. 합이 안 맞는 것으로 보일까 봐 걱정도 많았고.
- 촬영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갔다. CG로 구현된 부분도 많았으니까. 박정우 감독님이 화이트보드로 설명을 해주시는데 ‘이건 왜 이런 건데?’, ‘우린 어디에 있는 건데?’하는 질문을 많이 했었다. 영화가 생각보다 잘 나왔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글로는 이해가 잘 안 갔는데 영화를 보니 설명이 잘 되었더라.
‘해적’도 그렇고, ‘판도라’까지. 유난히 CG와 인연이 깊다
- 힘든 건 ‘해적’이 더 힘들었다. 그래도 ‘판도라’는 대충 만들어 놓고 CG를 덧입힌 거라서 공간이나 대상이 있지 않나. 하지만 ‘해적’의 경우는 허공에 ‘상어다!’, ‘고래다!’ 연기해야 해서. 하하하. 마침 ‘판도라’의 CG 팀이 ‘해적’에서도 같이 호흡을 맞췄던 분들이라서 ‘어떤 작품이 더 힘드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판도라가 10만 배 더 힘들었다’고 하더라. 다 고생했는데 특수효과가 많이 편집돼 아쉽다.
재혁은 기존의 김남길과는 다른 결을 가진 인물이다
- 예전에는 어떤 배우를 떠올릴 때, 한 가지 이미지 즉 명확한 축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양조위 같은 이미지를 좇았던 것 같다. 아프거나, 차갑거나 그런 이미지들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저를 두고 너무 슬픈 이미지들로만 떠올려서 곤란했다. 재혁의 경우도 주변 사람들은 ‘너무 남길이 같은 거 아니냐’고 했는데, 관객에게는 새롭거나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 기존의 연기에서 변화를 주기보다는 많이 내려놓고 편안하게 연기해보자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연기에 힘을 풀었다고 할까?
- 그런 셈이다. 같은 지문도 다르게 표현하고자 한 거다. 어떤 영화나 장르를 불문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 예전엔 조바심을 느꼈다면 지금은 많이 의연해지고 단순해졌다.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재혁 역에 많은 도움을 줬을까?
-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무뢰한’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재혁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예전보다는 수월했다. 만약 예전에 ‘판도라’를 찍었다면, 감정에 있어서 더 격하거나 과장되게 표현했을 것 같다.
언론시사회 당시에도 ‘힘을 많이 준 것 같다’는 연기 자평을 했었다
- 촬영하고 나서 성숙해지는 과정이 있지 않나. 촬영을 마친 뒤 빨리 개봉했다면 만족스럽게 봤을 텐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판도라’를 찍고 두 작품이나 더 찍다 보니까 그사이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거지. 하하하. 큰 화면으로 보고 나니 단점이나 허점이 왜 이리 잘 보이는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오그라들기도 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판도라’에 동조해 재혁이 많이 와 닿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신을 빼고 얘기할 수가 없겠다. 재혁이 극도의 공포를 느껴 울부짖는 장면에서 많은 분이 눈물을 보이더라
- 감정의 흐름을 따르고 싶어서 거의 모든 촬영을 따라 나갔다. 피난길 상황도 보고, 원자력발전소 상황도 보고. 그래야 제 연기 톤도 그것에 맞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 연기 톤을 잘못 잡아서 피난팀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보면서 맞춰서, 톤 조절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은 보는 이들까지 힘들 정도였다
- 예민했다. 이틀을 내리 굶었고 촬영하면서 실제로 힘도 바닥났다. 배가 부르니 그 상황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에너지가 바닥나야 그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그 장면에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 그 장면을 찍으면서 죽음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다큐멘터리를 자주 봤는데 사람과 동물 등 죽음에 관련된 영상을 봤었다. 촬영 시작 전까지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펑펑 울기도 하고. 힘들었던 것에 비해서 잘 안 나온 것 같다. 진짜 힘들었는데. 테이크를 한 두 번 더 가니까 체력도 바닥나고 감정도 안 나오더라. 스태프들이 ‘아쉽다’고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내 연기가 아쉬운 건지, 카메라가 아쉽다는 건지 분간도 안 가고. 오죽하면 조감독에게 ‘더는 못 찍겠다’고 했을까. ‘내가 나를 아는데, (감정이) 더 안 나와’라고 말하는데 자존심도 상하고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정신적으로도 고통이 컸나보다
- 그런데 감독님은 ‘야, 한 번 더 찍을까?’라고 하고. 하하하. 정말 예민해서 몸이 터질 것 같았다. 스태프들이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데도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결국, 다들 걱정해줘서 ‘그만하자. 욕심부리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 한 번 더 갔다.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죽을 것으로 보인다면 이 감정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였다.
원전 사고에 대한 첫 번째 영화인만큼, 작품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많고 너무 세다는 평가도 있었다
- 감독님은 주인공이 원전이라고 생각하셨다. 배우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정서적인 이야기를 더 붙이고 싶은데 그러려면 그 안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니까. 컨트롤타워를 인물로 생각하는 신도 있었다. 괴기스럽고 공포심을 자극하는 장면들. ‘감독님 이건 너무 간 거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하하하. 다큐멘터리처럼 가는 게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많았는데 그래도 잘 정리해서 드라마적인 요소가 잘 맞물리게 된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화와 현재 시국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 영화를 다 찍어놓고 한참 뒤에 지진이 났다. 지진을 실제로 겪은 분들은 살짝만 흔들림을 느껴도 뛰쳐나갈 정도로 극도의 불안을 느끼시는데 이 시점에 개봉하는 게 맞는지 고민됐다. 감독님과도 ‘잊힌 뒤에 개봉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얘기도 했었고. 하지만 여러 가지 시기 문제로 지금 개봉하게 되었다. 그건 제 손을 떠난 거니까. 이제 차분히 기다릴 뿐이다.
박정우 감독님이 또 다른 재난영화를 계획 중이라던데. 재난영화에 또 동참할 생각이 있나?
- 절대! 두 번 다신 안 할 거다. 하하하. 인류의 재앙 같은 걸 기획 중이라고 하시던데. 감독님은 유쾌한 분이신데 앞으로는 재난 영화라면 함께 안 할 거다.
‘판도라’가 어떤 평가를 받길 바라나?
- 사실 이전에는 ‘판도라’를 두고 ‘개봉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현 시국처럼) 될 줄도 몰랐고. 우리 영화가 개봉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 함께 고민해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