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중간수사결과가 발표됐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20일 최순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강요, 강요미수, 사기미수죄 등으로, 안종범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강요, 강요미수죄 등으로, 정호성을 공무상비밀누설죄로 구속기소하였다.
이와 함께 3인의 범죄사실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상당 부분이 공모관계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정식 피의자로 입건했다고도 밝혔다.
백 번을 양보해도 최고 권력을 동원한 뇌물수수 사건이다. 수뢰죄, 수뢰 후 부정처사, 일선수뢰 등 핵심죄목 적용이 제외된 건 매우 유감이다. 처음부터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검찰이 한 발 늦은 압수수색 등 석연치 않은 모습을 잇달아 보여주더니 결국은 국민께 실망감을 안겨주고 말았다.
떡검, 섹검, 벤츠 검사, 스폰서 검사... 부패한 일부 검사를 빗대어 부르는 이름이지만 가장 부끄러운 건 정치검사라는 오명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한민국 70년 역사를 보면 검찰이 처음부터 정치검사, 즉 권력의 하수인은 아니었다. 초대 서울지검장 최대교는 최고 권력자의 압력을 거부한 대표적인 ‘대쪽 검사’이다. 그는 18년 검사생활 동안 사표를 세 번이나 던졌다.
1949년 4월 정인보 감찰위원장(현 감사원장)은 현직 상공부장관 임영신을 사기와 수뢰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왔다. 1949년 1월 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 당시 상공부 직할 적산공장 관리인으로부터 직위보장에 대한 대가로 270만원을 받았다는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임 장관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녀로 불리던 권력 실세였다. 이승만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통해 압력을 넣었고, 유일한 여성장관이라며 부녀총동맹 등 여성단체도 성명을 내 그를 엄호했다. “우리나라 여성계를 둘러볼 때 인물이 아주 귀한 것이 현실입니다. 법을 세우기 위해 한국여성의 대표적 존재를 희생시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라며 임 장관을 보호하려 애썼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이인 법무장관은 공문을 보내 “장관, 도지사, 판사 등에 대한 기소는 법무장관에 대한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기소유예를 명령했다.
최대교는 “기소 또는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라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법무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의 기소 불기소에 간여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며 검찰총장을 경유하는 회신을 법무장관에게 발송해버렸다.
그리고 현직 장관을 불러 10시간이 넘도록 조사한 후 배임 및 배임교사, 수뢰 등 혐의로 전격 기소해버렸다. 한편 법원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공판을 진행하여 1949년 9월 17일 1심에서 임영신 피고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으나 그 비서실장 등 9명에게는 유죄를 선고하였다. 1주일 뒤 최대교는 깨끗이 사표를 던져버렸다.
최대교는 1949년 6월 26일 발생한 백범 김구 암살 사건도 지휘하고 있었다. 빳빳한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이승만은 검찰총장 김익진으로 하여금 직접 서울지방법원장에게 영장을 청구하도록 하여 한독당원 7명을 살인교사죄로 구속시켰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최대교는 사표를 들고 김익진을 찾아가 이승만의 지시였다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한 달 만에 다시 서울고검장으로 검찰로 복귀한 최대교는 3·15 부정선거사범과 4·19 당시 발포 책임자들을 기소할 때 주위의 회유와 잡음을 물리치고 엄격한 입장을 유지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고등문관 시험 합격을 통해 총독부 검사로 출발했지만 그는 조선인 절도피의자를 고문치사한 일본인 순사를 기소하지 않으면 사표를 쓰겠다고 버텨서 기어이 이를 관철시켰다.
누룽지 도시락, 관용차를 거부한 고집불통... “청렴하기 때문에 강직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국민 검사 최대교는 박정희가 5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1963년 정기인사에서 대구고검장으로 좌천시키자 사표를 제출했다. 그의 곧은 성품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검찰의 위기는 곧 기회다. 50년 만에 찾아온 명예회복의 마지막 찬스는 아직 남아 있다. 특검은 여전히 한 달 이상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최 광 웅(데이터정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