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차승원은 그림같은 풍광에 감정을 채워 넣는 작업을 마쳤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인간 김정호의 삶을 그린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감독 강우석)를 통해서다. 이번 작품으로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그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실존 인물을 연기하게 되었고, ‘거장’ 강우석 감독과 첫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강우석 감독님과 호흡을 맞춘 건 처음이에요. 저랑 되게 많이 (작품을) 한 것 같죠? 하하하. 사실 아니에요. 제작자 강우석 감독은 많이 만났는데, 감독 강우석은 처음이거든요. 제가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출연을 결심하게 된 것도 그 이유였죠. 아마 강우석 제작에 다른 감독이 연출한다고 했으면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철옹성 같다고 해야 하나. 제가 느낀 제작자 강우석은 몹시 멀고 어려운 존재였거든요. 워낙 대단한 제작자이기도 하고, 강우석이라는 사람이 대단했잖아요. 그런데 감독으로 만나니까 현장이 너무 따듯하고 즐겁더라고요. 스태프들 일일이 다 챙기고, 가족처럼 돌보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지도 꾼 김정호의 삶과 애환을 촘촘히 다룬다. 특히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김정호의 인간적인 면모였는데, 차승원 역시 이 부분에 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극 중 제 말투가 일반적인 사극 톤은 아니죠. 완전한 현대어도 아니고요. 이건 김정호라는 사람이 지도에 미쳐있지만, 그 외에는 너무도 허술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어요. 일반적인 사극 톤을 쓰는 순간, 경직되고 딱딱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완전한 현대어를 쓰는 것도 불가능하잖아요. 옛날 말을 터부시할 수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절충한 거죠.”
‘지도 꾼’ 김정호의 이면. 강우석 감독과 배우 차승원은 김정호라는 인물의 위대함과 더불어 따듯하고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의 바람은 지도 외에는 허술하기만 한 김정호의 모습을 파헤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코미디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고산자’ 속 코미디 연기는 정말 중요했어요. ‘이거보다 더 해야 하나? 아니면 덜 해야 하나?’ 늘 고민이었죠. 사실 지금 걱정인 건, 한참 이야기가 나오는 ‘내비게이션’이나 ‘삼시세끼’ 같은 대사예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은데.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사실 저도 약간 갸우뚱하는 대사였거든요. 하지만 감독님께서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준비하신 코미디 신이었고 하다 보니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연기할 때만큼은 몰입해서 했어요.”
처음 영화가 공개되던 날에는 ‘애드리브’인 줄로만 알았다. ‘고산자’ 김정호가 ‘삼시세끼’나 ‘내비게이션’ 같은 말장난을 하다니. 조금 당혹스러웠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장난은 극의 활기를 북돋워 주기도 하고, 은근한 중독성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아재 개그’(아저씨들의 썰렁한 개그를 뜻하는 신조어) 같다는 평을 남기자 차승원은 “이런 게 ‘아재 개그’인 거죠?”라고 되물었다.
“사실 ‘아재 개그’가 젊은 친구들은 싫을 수 있는데 누가 하느냐, 어떤 상태에서 하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잖아요.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정말 싫을 수도 있고. 유해진 씨처럼! 하하하. 우리 영화는 장르가 사극이다 보니까.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여 줄지 모르겠어요.”
은은한 코미디와 묵직한 드라마, 그리고 그림 같은 풍광 역시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앞서 강우석 감독이 “절대 CG가 아니라”고 강조할 만큼, 백두산 천지나 합천 황매산 등은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광활함을 자랑했다. CG가 아닌 게 더 놀라울 정도다.
“다들 CG냐 아니냐를 두고 말이 많은 건 같더라고요. 하하하. 실물로 봤을 때, 백두산 천지의 아름다움은 화면에 다 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눈으로 봐도 실제 같지 않았으니까요. 눈 앞에 펼쳐진 백두산의 모습은 묘하다고 해야 하나, 위압적인 기운이 있었어요. 오죽하면 ‘뭐라도 살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겠어요. 백두산 천지 괴물이 안 사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떤 기운 같은 게 느껴졌어요. 신비스럽고 조금은 이상한….”
하지만 놀랍게도 평소 차승원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엽서나 TV로 보는 게 더 좋은” 차승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풍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애써 찾아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직접 보고 나니 나 자신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게 되었어요. 그런 좋은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산에 오르고, 바다를 찾아가고 하는구나 싶었죠. 그 냄새나 공기 같은 아름다움 때문에요.”
공간과 풍경이 주는 감정들은 차승원의 연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면 ‘어떤 감정’이 마구 들끓기도 했으니까. 차승원은 이를 두고 “한국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뭔지 모르는 그 이상한 감정 있잖아요. 우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나,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는 장면 등에서 나타나는 그런 묘한 기분. 한국인이라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일렁거림을. 이상하게 가슴 뛰는 듯한 것들이요.”
어느덧 데뷔 30년 차.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 세월보다, 더 믿어지지 않는 것은 차승원이 이제까지 한 번도 실존 인물을 연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베테랑 연기자에게도 ‘처음’이란 두렵고 힘든 법. 그에게 “처음으로 역사적 인물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질문했다.
“그분의 위대한 업적은 다 표현할 수 없겠죠. 사실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을 연기하는 건 배우로서 득보다 실이 더 많아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그 위대함을 쫓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 부담감에서 시작했고, 아직 그 부담감은 가지고 있어요. 다만 우리 영화는 상업영화고 관객들이 이 안에서 어떤 재미를 얻고 가셔야 해요. ‘아재 개그’든, 풍광이든, 묵직한 드라마나 마지막 잔상이든지요. 그건 ‘돈을 내는 이’의 몫이고, 저는 이제 부담을 벗어버리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