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우리의 삶도, 한·중 관계도 ‘늘 푸른 나무’처럼 - 제주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인터뷰

2016-07-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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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 옷을 즐겨입는 성범영 원장은 자신이 30여 년간 조성한 정원의 모든 식물에 익숙하다.[사진=인민화보 둥팡(董芳)기자]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제주도의 명소 ‘생각하는 정원’의 주인 성범영 원장은 항상 거친 삼베옷을 입고 스스로를 ‘농부’라 칭한다. 그는 농부들의 끈기와 지혜를 빌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만 평방미터가 넘는 허허벌판 땅을 기이하고 아름다운 분재가 가득한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등 중국의 지도자와 각국 명사들도 모두 이곳을 다녀갔다.

지금도 ‘생각하는 정원’에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성 원장은 자신이 직접 가꾼 초목을 통해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풀어가고 있다. 또한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 민간외교관으로서 책임감과 사명을 다하고 있다.
꿈을 향해 거침없이 달린 세월들

성 원장은 1939년 경기도 용인 수지의 한 농가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전란 탓에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에 입대해 3년간 복무했다.

1963년 11월 전역한 그는 처음으로 제주 땅을 밟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 황금빛 감귤이 더없이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때부터 3년 동안 배를 타고 제주에만 30여 차례를 오갔다. 제주도민들과 현지 사투리로 대화하는 데도 점점 익숙해져 갔다. 오랜 고민 끝에 제주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이 한층 굳어졌다.

섬은 오묘한 마법처럼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성 원장은 갠 날이든 궂은 날이든 부단히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이곳에 자신이 구상한 정원을 조성하겠다는 꿈을 세웠다.

당시 와이셔츠 사업을 하고 있던 그는 서울의 번화가 어디에나 자신의 가게와 대리점이 있을 정도로 성공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모든 힘을 정원 조성사업에 쏟기 시작했다. 공장을 돌려 번 돈을 제주도에 투자하고 24번에 걸쳐 조금씩 땅을 사 들였다. 지금의 분재 정원이 조성될 땅이었다.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해 생겼기 때문에 흙 속에 온갖 자갈돌이 가득하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삽이나 망치 같은 간단한 공구로 일일이 돌을 골라내거나 부술 수 밖에 없었다. 체력 소모가 심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손목이나 어깨를 다치기 일쑤였다. 토지 정비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한 두 달은 아예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만 머물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돌을 골라내고 나서야 비로소 식목이 가능한 땅이 되었다. 여기에 다시 돌로 층층이 방풍용 돌담을 세운 후에 비로소 동백나무, 야자나무, 감귤나무 등의 묘목들을 심기 시작했다.

돌담을 세우긴 했지만 비바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성 원장의 아버지와 제주도 주민들은 함께 힘을 합쳐 벽돌로 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대문 없이 나무토막 몇 개로 주변을 빙 둘러 막았다. 바람을 단단히 막기 위해 벽돌로 돌담을 하나 더 쌓았다. 성 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열 명이 넘는 인부들이 매일 돌과 ‘씨름’을 했다고 한다. 성 원장 역시 돌을 옮기다 부상을 입어 수 차례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성 원장은 나무를 심으며 천천히 정원의 미래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이름을 ‘생각하는 정원’이라 지은 까닭도 들을 수 있었다. “정원에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놓더라도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해야 한다. 이 나무를 어디다 놓으면 좋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을 해치지는 않을지, 정원의 전체 구조와 조화를 잘 이룰지, 분재 좌대의 높이는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할지는 물론이고 사계절에 따라 변해갈 나무의 모습까지 일일이 그려봐야 한다. 또 매일 나무와 분재의 건강상태도 살펴야 되고, 사람과 자연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나 정원의 구도도 계속 관찰해야 한다. 이러니 매일 정원에 와서 계속 관찰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공상’에서 나온 정원

성 원장은 아무런 설계도도, 조언해 주는 사람도 없이 나무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만으로 마음속의 생각을 하나씩 실현시켰다. 정원의 구상에 골몰해 있을 때 마침 한 지인이 그에게 ‘제주 오름 능선코스’를 그려주었다. 화산 폭발로 생겨난 제주도의 가장 큰 특색은 기생화산으로 형성된 ‘오름’이다. 경사가 낮고 봉우리가 원형을 이루는 기생화산 모양은 분재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는 정원의 최초 모습이 되었다.

성 원장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에게 나무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우연히 훔쳐보게 된 한 정원은 그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또 그에게는 정원을 구성하는 나무와 풀꽃, 돌과 산수는 제각각 자신의 위치가 있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모두 하나의 얼굴이기 때문에 사람이 등지고 서면 풀꽃들도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줄 리가 없다. 보수를 계속하고 수 차례 방향을 전환하는 등의 노력 끝에 이곳의 풀과 나무들은 드디어 자신만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성 원장은 계속해서 분재를 공부하며 도처로 독특한 분재를 찾아 다녔다. ‘생각하는 정원’에 놓인 분재 하나 하나를 자식 대하듯 모든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는 가위질 한 번에도 나무와 다정하게 대화하며 생명을 담뿍 느낀다고 한다.
 

‘생각하는 정원’에 자리한 이 분재는 성범영 원장이 정성들여 조성한 것이다. [사진= 인민화보 둥팡(董芳)기자]


한번은 판징이(範靜宜) 중국 인민(人民)일보 편집장이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생각하는 정원’은 분재에 대한 판 편집장의 ‘편견’을 바꿔놓았다. 이같은 편견은 청나라 문필가 공자진(龔自珍)이 지은 『병매관기(病梅館記)』에서 나무를 학대하는 내용에서 비롯됐다. ‘병매’란 이른바 인공적으로 만든 매화 분재를 말한다. 저자는 여기에 청나라 왕조의 왜곡된 본성과 유능한 인재에 대한 말살을 투영했다. 책에는 ‘바른 둥치를 찍어 곁가지를 기르고 촘촘한 것을 솎아내 어린 가지를 죽이며, 곧은 것을 쳐내서 생기를 막아버려 비싼 값을 구한다. 이 때문에 장쑤(江蘇)성과 저장(浙江)성의 매화가 모두 병들고 말았다(斫其正, 養其旁條; 刪其密, 夭其稚枝; 鋤其正; 遏其生氣;以求重價)’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판 편집장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생기로 가득한 소나무 측백나무 매화나무 전나무 버드나무 분재들을 보고는 분재예술의 초목 재배와 가지치기 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성 원장은 말한다. “분재를 보고 나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분재가 건강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나무가 건강해야 비로소 이파리가 신선해지고,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간다. 어째서 나무를 손질하고 바로잡는 일을 두고 나무를 괴롭히거나 학대하는 것으로 여기는가? 평범했던 나무가 나의 설계와 재배와 가지치기를 통해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나무도 작은 어린 아이처럼 세심하게 가꾸고 돌봐줘야만 비로소 재목이 될 수 있다.”

성 원장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임업에 ‘무육’이라는 전문용어가 있다. 줄곧 물을 주고 비료를 뿌리는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임산작업장을 가 보고는 크게 놀랐다. 무육이란 것이 사실은 큰 도끼로 무참히 베어내고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내는 과정이었다. 곁가지를 거의 모조리 잘라낸 것도 있었다. 나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원사가 이렇게 혹독하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말했다. 재목이 되기는커녕 땔감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10여 년이 흘러 ‘한국 농부’ 성 원장과 ‘중국 학자’ 판 편집장은 어느새 오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성 원장은 판 편집장이 작고하기 전까지 중국에 갈 때면 반드시 그에게 연락을 취하곤 했다.

자오리훙(趙麗宏) 중국 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은 ‘생각하는 정원’을 둘러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기증했다. “생각하는 정원은 이 섬의 기이한 정경이요, 아름다운 것 중의 으뜸이고, 고요한 것 중의 제일이라. 크나큰 자연을 응축하고 천하의 다채로움을 담고 있으니, 100 이랑이 못 되는 땅이지만 한없이 드넓구나. 천천히 걷다 보면 사방이 풍경이라, 우뚝 솟은 산과 굽이치는 물길과 비죽대는 암석과 무성한 꽃나무와 우거진 초목이 눈에 들어오네. 조그만 화분 속에 수풀의 천태만상이 드러나니, 사방 한 치 속에서 천하의 정신을 펼친다.”
 

제주도 서부에 위치한 ‘생각하는 정원’은 몇 십년 전에는 황량한 산에 불과했다.[사진=인민화보 둥팡(董芳) 기자]


분재로 맺은 중국과의 인연

‘생각하는 정원’의 오솔길을 걷다 보면 성 원장과 중국이 맺은 인연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양국의 우정을 상징하는 돌과 나무, 분재가 생각하는 정원 곳곳에 놓여 있거나 정성스레 심어져 있다.
‘생각하는 정원’이 문을 연 지 막 3년이 되었을 무렵, 성 원장은 당시 외교통상부로부터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방문을 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성 원장은 혹여 실수가 있을까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 직원들과 함께 국가주석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성 원장은 자신의 저서 『초목인생』에서 이렇게 썼다. “장쩌민 (전) 주석은 무척 친절하고 자상했다. 모든 분재마다 앞에서 수형(樹型)과 수세(樹勢)를 면밀히 살펴보고 설명 문구를 자세히 읽었다. 그리고 수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 주석의 밝은 미소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가슴을 덥혔다. 생각하는 정원은 나에겐 집이나 마찬가지다. 집에 이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와 분재를 감상하며 만족한 웃음을 내비치는 순간, 그 소중한 추억은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게된다.”
 

성범영 원장(오른쪽)과 뤼장션(呂章申) 중국국가 박물관 관장[사진=생각하는 정원 제공]


관람을 마친 장쩌민 주석은 기념 휘호를 쓴 도자기 접시를 선물했다. 성 원장도 답례로 황피느릅나무 분재를 선물하며 말했다. “분재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기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그것은 나 자신의 인내심과 정직함, 창조력과 미적 감각을 기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장 주석은 이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쩌민 주석의 방문 이후 관광명소로 떠오른 이 곳은 매년 관광객이 30~40%씩 늘었다.

1998년 4월 30일에는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도 이곳을 방문했다. 성 원장은 이를 위해 경상북도에서 150년 된 육송(陸松)을 운반해 왔다. 그는 『초목인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기념식수를 마치고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과 한국의 우호 관계가 이 나무처럼 늘 푸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후 주석의 관람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는 모든 분재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감상했다. 또 ‘머지않은 미래에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100만명을 넘어서기를 바란다’고 축원해 주기까지 했다.”

‘생각하는 정원’이 이름을 알릴수록 관람객 수도 점점 많아졌고 성 원장이 중국으로부터 방문 초청을 받는 횟수도 더욱 늘어났다. 그는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양저우(揚州), 선양(瀋陽) 등지를 방문해 중국의 분재 현황을 살펴보고 유용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베이징임업대학교 등 대학의 학자들, 중국 각지의 원림·분재 전문가들과 인맥을 쌓고 협력하기도 했다. 그가 중국분재예술가협회 국제고문, 선양세계원예박람회 분재원 명예원장으로 초빙됐던 것도 분재와 중국의 예술가들과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성 원장의 접견실 벽에는 중국의 벗들이 보낸 몇 개의 글귀가 걸려 있다. 그는 바닥의 카펫을 가리키며 중국 친구가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친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향후 박물관이 완공되면 이 선물들을 그 안에 전시할 생각이다.”

내년은 중한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성 원장은 중국미술관의 우웨이산(吳為山) 원장과 100명의 사진작가들을 초청하여 ‘생각하는 정원’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담아 이를 중국미술관과 ‘생각하는 정원’에 각각 전시하기로 약속해 둔 상태다. 수교 25주년 기념석을 놓을 장소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었다.

성 원장은 1992년 개원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반평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1997년 금융위기의 한파가 불어 닥쳤을 때는 잠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지만 2004년에 도로 되찾아 왔다.

그는 이곳에서 세계 각국의 친구들을 만났다. 정원은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감동과 함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열정과 진심도 안겨다 주었다. ‘생각의 정원’에 있는 한 그는 매일 이곳을 몇 바퀴씩 돌며 식물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이들을 정성 들여 하나 하나 살필 것이다.

성 원장은 말한다. “나무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나무와 돌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인생의 비밀을 알려줄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를 통해 자연을 읽고 자연과 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굴하고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더 넓은 세계, 더 많은 사람들과 자유로이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성 원장을 만나고 나니 세상을 만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의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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