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유엔군이 다시 전쟁의 주도권을 잡아 마침내 3월 14일 서울을 수복, 공산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자 부산의 정계(政界)는 완연히 활기를 띠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4 후퇴 후 부산 정계에서 제일 먼저 큰 말썽을 일으킨 것이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과 거창사건이었다.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폭로된 것이 3월 29일이고 거창사건 조사위가 구성된 것은 3월 30일이다. 그런데 바로 4월에 들어가서의 어느 날이다.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목당(牧堂) 이활(李活)에게 전갈이 왔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목당은 다음날 지정된 시각에 아들 병린(秉麟)을 데리고 동대신동의 임시경무대(臨時景武台)로 향했다. 이날 이 대통령과 목당 사이의 대화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길이 없으나 아들에게 목당은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영국공사(英國公使)로 가라는 거야!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왜요?”
“자비(自費)로 가라는 것인데 어디 그럴 처지가 되니.”
목당은 이 일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더는 말한 일이 없다. 다만 그가 임시경무대를 나온 며칠 뒤인 4월 7일, 이승만은 외무부장관에 하영태(下榮泰)를 임명하면서 주영공사(駐英公使)에 이묘묵(李卯默), 주불공사(駐佛公使)에 김규홍(金奎弘)을 임명했다.
그런데 목당이 이때 주영공사 교섭을 거절한 것은 잘했다고 느끼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 9일에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의 사퇴 성명이 있었고 5월 15일에는 2대 부통령에 인촌이 피선되고 있었다.
‘김성수 씨가 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환영하며 국회에서 이같이 유능한 인사를 선출한 데 대해 감사히 여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피선 이전에는 일야인(一野人)으로서 정부를 자유로 비판도 하고 비난도 할 수 있으나 피선된 이후에는 정당이나 또는 개인적 정견(政見)을 떠나서 정부를 일심으로 육성하기에 일치 노력하는 것이 정치 도의며 또 그렇게 되기를 믿는 바이다.’
이승만은 이런 담화로 쐐기를 박고 있었다. 그런데 인촌이 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6월 26일, 국무회의가 부결한 신성모(申性模)의 주일대표(駐日代表) 임명을 이승만이 부결을 가결로 뒤집어 파견하는 일이 생겼다. 이 사건은 인촌을 절망감에 짜지게 했고 그는 마침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한편 정계는 이승만의 신당(新黨) 결성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으로 파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리고 목당은 1952년 4월의 제5회 무역협회 정기총회에서 친야인사(親野人士)로 몰려 회장직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목당은 인촌과 사돈이라는 인척 관계에 있었고 한때 한민당(韓民黨)에 몸을 담았었지만, 정부 수립과 더불어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 들어앉으면서 정계와는 손을 끊고 있었다. 무역협회를 정치와 관련짓는 것을 원치 않았고 무역협회는 민간 무역업자들의 경제단체 이상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그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태도 그의 지난 족적(足跡)이 화근이 되는 그런 판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