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의 히로인 혜리(21)의 시작도 그랬다. 드라마를 구상하던 중 ‘진짜 사나이’를 보고 “아, 이 아이다”고 생각한 신 PD는 결국 혜리를 자신의 드라마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덕선이와 비슷한 배우 혜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결국 ‘진짜’ 덕선이가 돼버렸다.
1월 26일 성수동 한 까페에서 만난 혜리는 ‘응답하라 1988’(극본 이우정·연출 신원호)의 덕선과 다르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 특유의 제스처, 누구나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까지 줬다.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는 이런 큰 작품에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소극적이었죠.”
“감독님은 계속 꾸며지지 않는 그대로 연기하기를 바랐어요. 연기 수업도 못 받게 하셨어요.” 혜리는 신 PD와 함께 자신과 덕선이 일치하는 부분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진짜 사나이’와 같이 예전에 출연했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을 돌려보게 됐고, 그리고 거기서 덕선이를 봤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봤어요. 때론 눈치를 보고, 어수룩하고, 해맑은 내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다른 사람도 모르고, 또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했죠.
혜리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수를 할 때는 화장을 하나라도 빼먹으면 무대에서 빛이 덜 난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배우는 달랐다. 내가 납득할 수 없으면 연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외형적인 것부터 납득 할 수 있게 바꿔 놓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립스틱을 찾고 걸음걸이를 팔자로 바꿨다. 조금 못나게 나오더라도 스텝들이 잘 찍어주고 예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혜리는 극 중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했다. 인터뷰 중 “덕선이는 사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 “택이는 덕선이가 늘 신경 쓰는 사람이고 그래서 덕선이의 마음이 가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하는 말들은 마치 덕선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다른 배우나 캐릭터와 호흡을 맞출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그 관계에 몰입했다. 덕선의 언니 보라와 고시원에서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실제 자신의 여동생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유난히 끔찍하게 생각하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연기를 하기 전부터 눈물이 났다고 했다.
몰입을 잘 해서 인지 드라마 촬영장에서 혜리는 정말 잘 울었다. 19화 중 아버지 성동일의 퇴임식 장면에서 감사패를 읽는 역할도 원래 김성균의 것이었지만 신원호 PD는 촬영 날 혜리로 갑자기 바꿨다. 이유는 단순했다. “잘 울어서”였다.
하지만 혜리는 “연기할 때는 실제로 울면 안 된다. 대사 전달도 안 되고, 배우가 뭘 연기하는 건지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눈물 연기에는 전혀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혜리는 “지금도 대사를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많이 연습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극에 완전히 몰입하면서도 전개를 방해하지 않으려 피나는 노력을 거듭한 것이다.
지금의 혜리를 만들어준 ‘진짜 사나이’에서의 앙탈은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까지 냉정하게 말하는 조교를 향한 혜리의 서운함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여자 시청자들이 욕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막상 혜리는 부담도 걱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시청자들은 그 진심으로 알아챘다. 덕분에 ‘응답하라 1988’에 캐스팅 될 수 있었고, 다시 진심을 다해 덕선을 연기할 수 있었다. 혜리는 “저 작품은 혜리가 아니면 안 돼. 혜리가 해야 호흡이 잘 맞아”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그 캐릭터가 됐으면 했고, 또는 그 캐릭터가 자신이길 바란다.
그 계산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혜리는 이동휘, 고경표, 류혜영, 류준열 같이 연기를 전공하고 경험이 많은 배우들과 촬영을 하면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감독님이 ‘너 안 쫄꺼 같아서 뽑았다’라고 하셨다”며 웃어 보인 혜리는 “선배들이 많이 격려해 주시고 알려줬다.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스텝, 배우 분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아직 차기작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혜리는 “아직은 연기에 여유가 없고 능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하기 힘들 것 같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거나, 특정 배우를 롤모델로 꼽는 일반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또 다른 덕선이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좋은 작품은 시청자 분들이 같이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했어요. 공감하고 이야기하며 함께 호흡하는 거죠.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하고 싶어요. 또 시청자와 캐릭터에 잘 공감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큰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