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산업 붕괴]발주처의 횡포에 모르쇠 일관하는 정부·채권단

2015-10-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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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스코 조선소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조선·플랜트 등 수주산업발 대규모 부실이 국가경제 망조론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개별 업체들의 대규모 손실 발생은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플랜트 부문은 사실상 시장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까지 몰리게 된 원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파악하지 않은 채 모든 부실의 원인을 업체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 더군다나 이를 주도하고 있는 주인공이 산업을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할 한국 정부와 정책·금융기관들이다.
왜 한국의 수주산업이 이 지경으로까지 몰리게 됐는지를 들여다 보기로 한다.

◆리바노스는 천사가 아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보여준 허허벌판의 조선소 부지 사진과 500원 지폐를 믿고 일감을 준 그리스 선주사 리바노스는 지금의 현대중공업 성장을 있게 한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별세 했을 때에는 조문을 와 현대와의 인연을 강조했던 그들.

하지만 리바노스가 그저 우리에게 고마운 이는 아니었다. 리바노스는 현대중공업에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VLCC) 2척을 발주했는데, 건조 과정에서 다섯 차례나 설계 사양을 바꾸는 등 처음으로 큰 배를 만드는 현대중공업에게 갖가지 어려움을 안겨줬다. 더군다나 리바노스는 선박이 건조될 시기에 원유 수요의 감소로 원유 수송업계에 불황이 닥치자 1호선인 애틀런스 배런만 인수하고 2호선인 애틀런스 배러니스는 인수를 거부했다. 이로인해 현대중공업은 3300만달러(당시 한화 168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날릴 뻔했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선주 또는 발주처는 수주업계의 ‘친구’이긴 하지만 ‘천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3분기 실적을 공개한 현대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대우조선해양이 대규모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분기 실적 공개 대상이 아닌 성동조선해양과 SPP조선 등 중소 조선사들과 플랜트 업체들의 사정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기업이 밝힌 적자 발생의 원인 가운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선주(발주처)의 설계변경에 따른 인도지연 등으로 공수 증가 등 예상치 못한 손실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손실은 건조 또는 완공 후 협의를 통해 발주처의 잘못으로 발생한 부문은 비용을 ‘체인지 오더(Change Order)’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데, 이 체인지 오더를 발주처에서 주지 못하겠다고 발뺌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2년 전 국내 조선·플랜트 업계의 부실은 이러한 손실을 선반영한 부분이 크며, 이후 받은 체인지 오더로 메울 수 있었기에 실적은 다시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발주처들이 체인지 오더 지급을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 내에서 수주산업을 호도하는 비난 여론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함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 부처와 정책·금융기관이 알아서 모든 부실의 원인을 기업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질타하니 “한국내에서 마녀사냥을 해주고 있는데 우리가 굳이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나”라는 분위기가 발주처·선주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안줘도 된다”는 식으로 버티기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울트라 슈퍼 갑’ 발주처 횡포에 농락당한 수주산업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을’의 입장이었던 선주들은 이후 ‘갑’으로 변신했다. 아니, 속된 말로 ‘울트라 슈퍼 갑’이 됐다고 표현한다.

금융위기 발발 직후 2009~2011년 기간 동안 국내 조선소 안벽과 주변 바닷가에는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선박들이 즐비했다. 해운업황이 붕괴 상황까지 간 마당에 비싼 가격에 건조한 선박은 선주들에겐 ‘악성재고’였으니 아예 인수를 포기하고 잔금을 치르는 대신 조선소에 넘겨 버린 것이다. 조선소들이 이들 선박을 유지·관리하려고 하루에만 척당 1억원 내외의 돈을 써야했는데, 그런 선박들이 수십 척이었다. 울며겨자먹기로 선박을 압류한 조선사들은 건조대금에 훨씬 못 미치는 헐값으로 되팔아야 했다.

그런데, 인도를 포기했던 선사들은 악성재고 문제가 해결되자 선박을 다시 발주했다. 상황은 180도로 변해 조선사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으로 선가를 후려치는 데다가 건조대금 결제방식도 인도 시점에 대부분을 지급하는 ‘헤비테일’ 방식을 종용했다. 문제는 선주들의 고압적인 압박이 점점 강해지면서 인도 시점에 대금을 지급하는 비중이 전체 선가의 80%에 달했다는 것이다. 플랜트 업계도 사정은 비슷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사나 플랜트 업계와 같은 수주업계는 발주처가 지급하는 대금으로 건설·건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일감도 모자란 현실에서 발주처들이 벌이는 횡포를 감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금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자체자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수주산업 부실은 바로 건조·건설자금을 자체적으로 마련하다 보니 벌어진 측면이 크다.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저가 수주보다 더한 고통이다.

여기에 업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발주처와 선주들은 인도시기를 늦추거나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 변경과 조업과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괴롭힌다. 리바노스처럼 말이다.

◆‘자살하라’ 부추기는 정부와 채권단
조선 빅3와 플랜트업계의 부실이 연이어 터지자 국내 여론은 이들 수주산업이 국가경제를 망치고 있다며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조선·플랜트 업계의 해외 전문 매체들은 한국의 사정을 알리면서도 호들갑 떨지 않는다. 오히려 더 차분하게 객관적인 상황에서, 어렵지만 가능성을 모색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만큼 한국의 수주산업이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한국이 아닌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산업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들고 일어나 대우조선해양과 성동조선해양, STX조선해양은 스스로 자결하라고 부추기고 있으니. 이런 틈을 선주와 발주처들은 인정을 호소하며 바라만 보지 않고 있다. 체인지 오더 지급 거부, 안되면 발주 취소, 완공된 선박·플랜트 인도 거부 등 철저히 자기 이익 챙기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봐야 한국에서는 무조건 조선·플랜트 업계가 잘못했다고 해주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이전까지는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했던 이러한 뻔뻔한 짓을 최근에는 드러내놓고 벌이고 있다.

답답한 점은 도무지 우리 정부와 정책·금융기관들은 이러한 만행을 보고도 못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수주산업의 부활을 위한다면 채권단이 직접 발주처를 찾아가 결제 방식의 개선을 요구하고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건조 대금 납부를 촉구해야 한다. 만만한 게 우리 업체인 양 우리 기업을 우리가 죽으라고 하고 있다. 아픈 아이를 아프게 만든 상대방의 잘못은 등한시 한 채 꾀병만 부린다며 매질만 더 하니, 아프게 만든 상대방도 같이 아프게 하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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