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부친 고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신한해운을 설립해 해운업에 처음 진출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신한해운과 현대상선은 현씨 일가와 정씨 일가를 이어주는 매개역할을 했다. 현대상선이 현대가의 것이지만 성장을 담당한 것은 현씨 일가였다. 투자자들의 우려, 범 현대가의 잠재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현 회장이 현대상선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현씨 가문의 가족기업 같았던 회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 현씨 일가의 가족기업 ‘신한해운’
현씨 일가는 일제시기 호남의 대표적인 지주 집안이자 많은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 집안이다.
고조부 학파 현기봉은 1914년 신흥제철소를 설립했고, 광주농공은행 이사, 일청생명보험회사 상의원 등 다수의 기업 경영에 관여했다.
조부 무송 현준호도 1920년 호남은행(조흥은행의 전신, 신한은행에 합병됨)을 설립해 은행장을 역임했으며, 1924년에는 가족 회사인 학파농장을 건립했다.
무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현영원 회장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남침한 북한군에 의해 아버지와 큰 형 영익, 작은 형 영직씨가 피살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루아침에 장손이 된 현영원 회장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1964년 1500t급 해안호를 도입해 신한해운을 설립했다. 신한해운은 부친이 경영한 학파농장처럼 현씨 일가의 가족 회사였던 셈이다.
◆ 현대상선 태동과 성장에 기여
신한해운은 현영원 회장이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사돈의 연을 맺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현대그룹이 해운업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2년 정명예회장이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착공 직후 홍콩 선주들을 초청한 자리에 참석한 현영원 회장은 선주들을 설득해 현대중공업이 2척의 유조선을 수주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사돈의 연을 맺기로 하고, 정 명예회장의 5남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현영원 회장의 차녀인 현 회장의 만남을 주선해 결혼하게 된다.
현대중공업에게 최초로 유조선 2척을 발주한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가 두 번째 선박 인수를 거부하자 정 명예회장은 이 선박으로 1976년 3월 25일 아세아상선을 세우는데, 현영원 회장은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물론, 정 명예회장에게 해운업과 관련한 많은 조언을 해줬다.
1984년 신정부의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로 신한해운이 1년전 사명이 바뀐 현대상선에 통합됐다. 정 명예회장의 배려로 현대상선 회장에 취임한 현영원 회장은 1995년까지 대표이사 회장을 맡으며 회사를 성장시켰다.
현영원 회장은 사위 정몽헌 회장의 멘토 역할을 했다. 2000년 왕자의 난으로 정씨 일가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대그룹은 현대상선과 현대아산, 현대엘리베이터 등만 남은 소그룹이 됐다. 현대상선 상임고문으로 있던 현영원 회장은 2001년 현대상선 회장으로 복귀하며 현대그룹 경영안정을 도모했다.
2003년 정몽헌 회장 별세와 뒤 이은 현 회장 체제로의 전환 속에 현대그룹을 되찾으려는 정씨 형제들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는 가운데에서도 현대상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현영원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에 속했지만 실제 회사를 키워낸 주역은 현씨 일가였다. 따라서 현대상선을 매각한다는 것은 현대그룹의 존폐를 흔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업가 집안이었던 현씨 가문의 전통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주력기업이자 현씨 집안도 포기할 수 없는 자산이다”며 “현 회장으로서는 반드시 지켜내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