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만연돼 있는 잘못된 법과 제도, 의식과 관행을 선진화하지 않으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 경제의 재도약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일궈내 품격 있는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를 짚어본다.
아주경제 주진 기자 = 국회는 지난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된 후 여야 대치정국으로 거의 넉 달 동안 단 한 건의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식물국회'로 전락했다.
기획재정부는 경제활성화 대책 중 이번 정기국회에서 처리돼야 할 경제분야 법안으로 102개를 제시한 바 있다. 외국인 투자 시 증손회사의 최소 지분율을 50%로 완화하는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 서비스산업 활성화를 위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이다.
특히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GS칼텍스 등 국내외 정유사들이 2조3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다. 임신 12주 이내와 36주 이후 여성근로자의 근로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축소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자녀의 연령을 9세 미만으로 높이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 등도 포함돼 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으로 여야 정쟁이 1년여 동안 지속되면서 정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지역 패권주의. 이념 대결 후진적 정치문화, 법·제도로 바꿔야=후진적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역 패권주의, 이념·정파 대결, 금권정치, 토론문화의 부재, 후진적인 법·제도 등 정치구조를 꼽을 수 있다.
정권을 잡은 지역이 정치·경제·사회분야 등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정 정당이 지역 의석을 독점하는 등 기형적이고 후진적인 정치구조가 수십년간 계속돼 왔다.
정치가 극한대결로 치닫는 데는 '전무 아니면 전부'인 승자독식 정치구조와 문화 때문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여당이 모든 것을 다 가지면서 이긴 쪽과 진 쪽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무조건 이기기 위해 지역감정, 이분법적 진영논리, 정파·계파 등 저급한 패거리 정치, 색깔론 같은 이념 공격까지 서슴지 않게 되면서 국민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불신을 증폭시켜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멍들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정치권 병폐를 막기 위해서는 권력구조 개편, 공천혁명, 선거제도·정당개혁 등 정치 선진화를 위한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정치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조국 서울대 교수 등 진보 성향의 일부 정치 학자들은 지역주의 해소를 넘어 정치적 대표성, 책임 정당정치 등 다양한 가치를 실현하려면 비례대표 확대와 정당명부제가 해답이라고 주장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의 후진적 정당체제를 재생산하는 구조적인 원인으로 정당 국고보조금 제도와 원내교섭단체의 의원수 자격 요건, 소선거구제 등을 지적하면서 특히 소선거구 단순 다수 의회선거제도와 단순 다수 대통령제와 같은 승자 독식의 선거제도가 권력을 놓고 투쟁하는 양대 정당 체제를 만든다고 비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정당공천제도와 관련해 "상향식과 하향식 공천의 단계적 절충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완전참여경선제로 가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단 없애야=제왕제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민주적 국정운영을 위해 국무총리 및 장관에게 실질적 권한 부여(책임총리제)를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새 정부 들어 책임총리·장관제는 실제 국정운영 과정에서 유명무실화되고 있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명' 사태까지 불거진 것은 책임장관제가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지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진영 항명파동과 관련해 "진 장관의 말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참모들이 장관, 즉 내각 위에 군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뉘앙스를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문제가 노출됐다면 참모진과 내각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르긴 하지만 개헌문제도 서서히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책임총리제 등 대통령 권한의 분산은 개헌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뤄지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 1년 동안 벌어진 '정치 실종사태 장기화'는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정치력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치권의 분석이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대통령 리더십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정치의 복원은 대통령과 정치권 모두의 책임이지만 문제를 풀어가는 책임은 누구보다도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여당 내에서조차 청와대의 정치권과의 소통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데다, 일부 여당 의원들은 당청 및 대야 소통을 위해 정무(특임)장관 부활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아주경제 기자와 만나 "좀 더 분발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있다"며 "정무장관직을 부활하려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야 하는 절차도 있다"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다만 과거 이명박 정부 때의 정무특보 부활은 절차상으로 큰 부담이 없어 고려해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정책정당 기능 강화 및 시민정치참여 확대=정치력이 실종된 여야간 정쟁은 결국 국민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여야간 정쟁을 무조건 후진정치라고 비판하기보다는 여야간 갈등을 순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인 시민의 정치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아울러 여야 역시 정당의 정책 기능을 강화해 사회·경제적 정책 개발에 집중함으로써 정치현안보다는 이념과 정책 선명성으로 정치 수요자인 국민의 표심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당 부설 정책연구소들이 선거를 의식한 급조된 정책과 공약(공약)의 남발로 정치 불신을 가중시켜 왔다는 점에서 운영에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