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국지은 기자 = 슬플 창(愴) 목숨 수(壽).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영화 ‘창수’(감독 이덕희)의 야야기가 추워진 날씨 속 입김처럼 사라지다가 유리창에 맺은 물방울처럼 잔잔히 마음을 울린다. 주인공 창수(임창정)의 독특한 습관이 잔상으로 남는다. 고개를 흔들며 앞머리를 넘기는, 처음엔 어색하지만 후반부에는 익숙해진 그의 버릇에서 영화 ‘다크나이트’ 조커의 입맛 다심이 연상된다.
누가 이만큼 창수를 연기할 수 있을까. 내일이 없는 징역살이 대행업자 창수를 연기한 임창정은 이번을 계기로 기존의 코믹 이미지를 탈피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임창정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작품을 하게 된 계기요? 그건 엄청난 운이죠. 앞서 출연한 ‘공모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코믹스러운 역할이라 연기변신을 위해 선택했느냐고들 하시는데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에요. 먼저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그 중 하나를 선택을 했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감독님도 저를 받아주셔야 하고 제작자와 협의해야 하고 스케줄을 맞춰보는 등 어마어마한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이 다 들어맞을 때 작품을 할 수 있고 또 세상에 나오기까지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요. 저는 누군가에게 선택되는 광대예요. 제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리고 (역할이) 정해졌으면 최선을 다하는 거죠. 대중예술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20여 년 영화계에서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또 좋은 작품을 만나 인정을 받아온 행보를 보면 말이다. 그 역시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창수’를 만난 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는 그는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창수’는 내일이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창수가 내일을 살고 싶은 여자 미연(손은서)을 만나면서 벌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느와르 영화다.
“서른 살 넘는 나이에 창수처럼 하고 다니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죠. 처음 만난 미연에게 반해 모든 걸 다 주잖아요. 만약 중고등학생에게 미연 같이 아름다운 여성이 적극적으로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세상 물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남자들에게도 창수 같은 마음은 언제나 존재해요. 그 부분을 알아챘을 때 연기할 자신이 생겼어요.”
그는 덧붙여 “그렇다고 창수가 했던 모든 행위가 미연을 위해서만은 아닐 터”라고 강조했다. 창수는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습이 존재하는 인물, 임창정이 생각하는 창수는 어떤 사람일까.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허세를 어김없이 드러내는 인물이죠. 창수가 감옥살이를 하면서 상태(정성화)에게 신혼집을 구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잖아요. 그런 모습은 아마 여성분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마치 술 먹고 본인은 집까지 걸어가도 후배 택시비를 주는 행동이랄까요? 우리가 ‘중2병’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창수는 딱 15살에서 멈춰버린 남자입니다. 이런 허세도 미연에게 빠지는 모습도요. 어느 누군가는 창수를 세상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닳고 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죠. 두 모습 다 창수에요.”
임창정은 창수의 복잡한 인격을 대사, 표정, 눈빛으로 표현하며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던 머리를 넘기기는 버릇은 허풍을 떨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또 본디 올바르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를 잘 대변한다.
“일부러 의도한 행동이에요. 지금은 완전히 버릇이 완전히 됐어요. 팔자걸음도 의도해서 걸었는데 이제는 걸음걸이가 아예 그렇게 돼 버려서 큰일이에요. 창수를 연기하기 좀 더 수월했던 이유는 이덕희 감독님과 창수가 너무나 닮아있었어요. 감독님을 옆에서 열심히 연구하면서 연기를 했습니다. 술 마시면 더욱 똑같아요. 근데 본인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웃음)”
그는 “감독님과 영화를 찍지 않더라고 평생 함께할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우정을 과시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라면 어렵사리 개봉하게 된 과정이 준 돈독함이지 않을까. ‘창수’는 2년 전에 모든 촬영을 마치고도 쉽게 개봉하지 못했다.
“개봉한 느낌이요? 마치 못난 자식 장가보내는 기분이에요. 구제 불능 같던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결국엔 다 키워놓은 느낌이죠. 잘된 아이보다 더 애틋하고 짠한 느낌이랄까요? 대형 배급사에서 나온 영화가 아녀서 인지도가 낮아 걱정했는데 점차 입소문이 났고 결국 개봉을 하게 됐어요. 흥행성과보다는 지금 개봉한 것 자체가 정말 기뻐요.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리는 마음이에요.”
여러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다고 한 그는 언젠가 팬들에게 자기의 자비를 털어 함께 엠티를 갈 것을 약속했다. 베풀고 나눌 줄 아는 그의 얼굴이 ‘공모자’ 때보다 밝아진 느낌이다.
“주름은 생기고 피부는 까칠해졌지만 얼굴이 좋아졌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일부러 항상 웃고 다니거든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겁니다.”
방긋 웃는 그는 ‘창수’로 성장했고 또 많은 것을 느낀 듯해 보였다. 여유와 행복함이 공존한 미소가 그를 더 빛나 보이게 한다. 손익분기점이 넘는다면 기자들에게도 술 한 잔 대접하고 싶다고 약속했는데… 연말 그와 함께 술을 기울이며 개봉 후 ‘창수’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순간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