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 그리스 사태와 미국의 더블딥(이중침체) 우려로 인한 안전자산 쏠림으로 신흥국 주식시장이 주저앉은 데 이어 통화 가치도 추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흥국 통화는 채권과 현금, 현금 파생상품 등에 힘입어 꿋꿋이 강세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헤지펀드를 비롯한 단기 투자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약세 압력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달 들어 브라질 헤알화,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화, 폴란드 즐로티화는 달러화에 대해 각각 9% 이상 가치가 떨어졌고, 외채 부담이 큰 헝가리의 포린트화 가치는 달러화에 대해 10% 넘게 추락했다. 이외에도 중국 위안화를 제외한 주요 신흥국 통화가 올 들어 모두 달러화에 대해 약세를 기록하고 있다. 위안화는 달러화에 대해 연초 대비 3.2% 올랐다.
승승장구했던 신흥국 통화가 약세로 급전환하면서 환율 변동성도 크게 확대됐다. 이를 반영하는 JP모건이머징마켓변동성지수는 지난 7월만 해도 2008년 이후 최저치인 8.50에 그쳤지만, 지난 19일에는 3년래 최고치인 15.04까지 급등했다. 지난달 그리스에 대한 추가 지원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위기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전이될 가능성이 고조된 탓이다. 같은달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도 대형 악재로 작용했다.
유럽 재정위기는 물론 중동부 유럽 통화에 가장 큰 충격을 줬다. 러시아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유럽 금융권에 의지해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 왔기 때문이다. 특히 2008년 금유위기 이후 동유럽은 단기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더 커져 외부 자금 유출에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됐다.
이탈리아 은행인 유니크레디트는 최근 수년간 기관투자자들 사이에서 유망한 투자처로 꼽혔온 폴란드와 터키가 가장 큰 위험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터키의 리라화가 최근 다른 신흥국 통화에 비해 가치 하락폭이 적은 것은 이미 떨어질 만큼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FT는 설명했다. 리라화 가치는 올 들어 달러화에 대해 무려 15% 급락했는데, 이는 주요 신흥국 통화 가운데 최대 낙폭이다.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지역 통화 가치도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 이 지역 통화는 1998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각국이 공공부채를 줄이며 재정 건전성 개선에 역량을 모으면서 고속 성장세와 함께 강세를 구가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글로벌 위기는 수출 주도형 경제에 악재로 작용해 투자매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FT는 한국이 직면한 위험이 특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이 잘 개방돼 있고,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의존도가 큰 만큼 외부 악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한국은 2008년 말 2000억 달러 수준이었던 외환보유액을 최근까지 3100억 달러로 늘렸지만, 단기 외채 규모가 외환보유액의 절반에 달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권영선 노무라 이코노미스트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잘 개방된 시장인 만큼 외부 리스크에 매우 취약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