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8년 5월12일 오후 2시28분(현지시간). 리히터규모 8.0의 대지진이 중국 쓰촨(四川)성을 강타했다. 원촨(汶川)대지진 혹은 쓰촨대지진이라고 불리는 이 대재앙이 발생하자마자 류치바오(劉奇葆) 쓰촨성 서기는 짧은 회의를 가진 후 지진발생 1시간여만에 차를 타고 지진의 진앙지 원촨으로 향했다.
원찬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신속하게 부상자를 구조할 것’ ‘재해지역 수재민을 안전지대로 신속히 옮길 것’ ‘수재민들의 의식주 보장책을 강구할 것’ 등의 7가지 구재원칙을 지시했다.
류치바오를 태운 차는 원촨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도로가 심각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육상진입이 불가능해진 만큼 일행은 인근 두장옌(都江堰)시로 향했다. 그 와중에 그는 다시 지시를 내려 피해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을 통제했다. 또한 쓰촨성 공안부 공무원들을 모두 동원해 구제차량이 진입할 수 있도록 도로망을 최대한 빨리 다시금 복구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이 조치는 지진 발생 초기단계에 이뤄져 훗날 지진구호작업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
그날 오후 6시, 강진 후 세찬 비가 내리던 두장옌시의 공안국 입구 인도에 마련된 군용 텐트 안에서 지진구호 지휘부가 설립됐다. 총지휘관은 물론 류치바오 서기가 맡았으며 장쥐펑(蔣巨峰) 성장, 리충시(李崇禧) 쓰촨성 상무위원이 부지휘관을 맡았다.
류치바오는 3개팀으로 성 지도자들을 나눴다. 1번째 팀은 6대 중재해지역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관료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2번째 팀은 두장옌의 지휘부에 상주시켰으며, 3번째 팀은 청두에서 지원업무를 맡도록 했다. 류치바오는 스스로 제1팀을 선택했다. 또한 그는 11명의 성 지도자가 각각 총당직실, 의료 보장, 교통 보장, 통신 보장, 수리 감독, 구재 물자, 선전 보도 등의 업무를 분담토록 했다.
그는 지휘부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제1번째 임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수재민들을 구해내야 하고, 구조된 수재민들에게 간이텐트, 식수 등 의식주를 제공해야 하고, 재해지역에 방역작업을 철저히 해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튿날인 5월13일 류치바오는 쓰촨성 인민들에게 자원봉사를 와줄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쓰촨성 인민들에게 “지진으로 강산이 변할 수 있습니다. 도로가 끊어질 수 있습니다, 주택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재활동에 대한 굳센 결심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인민들의 지혜와 힘을 한데 모아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갑시다”라고 독려했다. 류치바오는 인민들의 적극적인 구재활동 참여를 유도했고 재해지역 민심의 동요를 막았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5월 14일 오전 류치바오는 완전히 무너져내린 베이촨(北川)의 중고등학교 구조현장을 찾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한 학생이 숨져있는 선생님을 눈두고 목놓아 흐느끼는 광경에 류치바오의 눈에서도 역시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류치바오가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를 끌어안고는 슬픔에 복받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광경도 목격됐다. 류치바오는 이 곳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지상최대의 임무입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람을 구해내겠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겠습니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후 몐양(綿陽), 베이촨, 원촨현, 펑저우(彭州)시, 두장옌시 몐주(綿竹)시 등 주요 재해구역을 반복적으로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인명을 구해내야 한다고 목이 터져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쓰촨대지진으로 6만9227명이 사망했고 1만7923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는 무려 1500억위안에 달했다. 당시는 쓰촨성의 최고 지도자인 류치바오가 쓰촨성 서기로 부임해온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류치바오는 당시 인민들의 슬픔을 함께 나눴으며 열정적이면서도 침착하고 의연한 대처로 구재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공청단파의 한 이름없는 정치인이었던 그는 구재과정에서의 활약으로 중국인들의 뇌리속에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일약 스타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촉도에서 청산에 오르다
“촉나라 가는 길 어려워라.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青天).”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지은 ‘촉도난(蜀道難)’의 한 구절이다. 쓰촨지역의 험준한 지형을 노래한 이 유명한 시와는 대비적으로 류치바오는 촉나라의 길에서 ‘푸른하늘(青天)’에 오르고 있다. 쓰촨대지진 수습과정에서 발군의 역량을 보여준 점이 중국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올해 일어난 일본 대지진의 사후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던 점과 대비되면서 류치바오는 내년 있을 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이 유력시되고 있다.
1953년 출생한 류치바오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사회를 덮쳤던 시절, 15세에서 19세까지 안후이(安徽)성 쑤쑹(宿松)현의 한 생산대 지도원으로 재직했다. 이후 류치바오는 ‘공농병학생’ 자격으로 안후이사범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한다. 1974년 졸업한 후 그는 교편을 잡지 않고 공직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즉시 안후이 성위원회 선전부 이론연구반에서 일했으며, 3년 후 성 위원회 판공청 비서실로 이동한다.
류치바오는 중국개혁파 원로인 완리(萬里)가 안후이성 서기이던 시절 비서직을 수행하며 완리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완리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안후이성 서기를 역임했다. 1980년3월 완리는 베이징으로 올라가 국가농업위원회 주임을 맡았으며 이후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했다. 완리가 떠난지 3개월 후 27세의 류치바오는 공청단 안후이성 위원회 선전부 부부장으로 옮겨갔다. 이후 그는 공청단 안후이성 부서기와 서기로 차례대로 올라간다. 현재 정치국위원이자 광둥성 서기인 왕양(汪洋) 역시 당시 공청단 안후이성에서 근무했었다. 1982년 류치바오가 선전부장을 맡았을 때 왕양은 선전부 부부장이었고, 류치바오가 1983년 안후이성 공청단 서기에 올라섰을 때 왕양은 부서기였다.
◆공청단 서기처 서기로 8년
1985년 11월 32세의 류치바오는 베이징에 입성한다.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는 후진타오 주석이구이저우(貴州)성 서기로 내려간 후 쑹더푸(宋德福)가 제1서기를 맡아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는 즉 제1서기 쑹더푸, 서기 류옌둥(劉延東), 리위안차오(李源朝), 장바오순(張寶順), 리커창(李克强), 뤄쌍(洛桑), 류치바오, 펑쥔(馮軍)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향후 후진타오 주석을 정점으로 하는 공청단파의 핵심멤버로 성장한다.
2년 후, 1988년 공청단 12차 중앙위원회에서 류치바오는 다시 서기처 서기로 당선됐지만 그의 서열은 여전히 끝에서 두번째였다. 당시 서기처 서기들로는 리커창, 류옌둥, 리위안차오, 장바오순 등이 버티고 있었다.
1992년 류치바오는 지린대학 경제학 석사학위를 얻었다. 장바오순, 뤄쌍, 펑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린대학의 경제학 석사학위를 얻었다. 류옌둥 역시 곧 1998년의 지린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류치바오는 공청단 중앙위원회에서 8년여 근무한 후 1993년 인민일보의 부총편집으로 전임됐다. 하지만 인민일보의 다른 리더들과 기자들은 노동병학생 출신에 석사학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부총편집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비교적 한직인 이 곳에서 다시 6년을 일한다.
◆광시에서 외자유치 활동
이 시기에 공청단파들은 대부분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장바오순은 신화사 부사장직에 있었고, 리위안차오는 문화부 부부장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이 인사에 영향력을 가지게 된 2000년이 되자 리위안차오, 류치바오, 장바오순은 동시에 지방관리로 등용된다.
2000년 류치바오는 광시(廣西)장족자치구 부서기로 이동한다. 이후 2006년에 비로소 광시장족자치구 당서기에 올라서게 됐다. 류치바오는 광시에서 간부인사제도를 개혁했으며, 광시지역에 사기업들을 집중 육성했으며 아세안 박람회와 광시의 타이완 경제무역 교류회 등을 자주 개최해 해외 투자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그의 재임중이던 2007년 5월에는 ‘보바이(博白)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보바이사건은 광시 자치구 위린(玉林)시 보바이현 사베이(沙陂)진에서 약 1만명의 시위대가 진정부 청사와 차량에 방화하는 등 폭도화하면서 진압 경찰과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냈던 사건을 말한다. 위린시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 가정에 대해선 ‘사회부양비’ 명목으로 최고 2만 위안을 수일 내 벌금으로 내도록 했으며, 시 당국은 이미 자녀를 가진 일부 여성에 대해 강제로 피임시술을 시행해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었다.
◆쓰촨에서의 복구활동
2007년 류치바오는 쓰촨성 서기로 이동해갔으며, 쓰촨대지진을 겪게 된다. 지난 5월12일 쓰촨대지진3주년 행사때 류치바오는 “대지진 발생 이후 정부에서 피해 복구를 위해 진행한 4만1130개 프로젝트 가운데 95%가 완공됐으며, 나머지는 오는 9월말까지 완공될 예정이다”며 “현재까지 8851억위안의 공사비가 투입돼 폐허에 불과했던 원촨 지역이 현대식 고층 아파트, 넓고 깨끗한 포장도로, 우수한 교육설비가 완비된 학교 등이 갖춰져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이어 류치바오 서기는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 중국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보내준 따뜻한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불과 3년만에 피해 현장 대다수가 복구돼 ‘중국의 기적’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며 ”다시 일어선 쓰촨성 주민들의 모습이 중국 대륙에 희망의 상징이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