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현재 중국의 정치계에 이보다 핫(hot)한 인물이 있을까.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가 한 일들은 어떤 결과를 낳았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해졌는지를 떠나 무수한 논쟁과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중용을 강조하고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중국의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매사 적극적이며 에너지가 넘쳐 어디를 가든지 능히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보시라이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186㎝에 달하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부터 여느 중국 관료와 다르다. 뛰어난 화술과 세련된 매너, 능수능란한 유머 감각과 친화력은 외국 기자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공산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인 보이보(薄一波, 1908~2007)다. 보이보는 덩샤오핑(鄧小平)과 더불어 1980년대 개혁개방정책을 막후 조종한 ‘8로(八老)’ 중 한 명이었다. 사회주의정권 수립 이후 줄곧 최고 지도부에 머물렀고 국무원 부총리까지 역임했다.
◆무너진 국무원 총리의 꿈
개인의 능력과 아버지의 후광으로 그는 승승장구했다. 2007년 17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상무부장이던 그는 시진핑(習近平) 상하이(上海)시 서기,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서기창, 리위안차오(李源朝) 장수(江蘇)성 서기와 함께 차세대 4대천왕으로 불렸다.
2007년 당시에는 차기지도자로 ‘리커창 국가주석 - 보시라이 국무원 총리’ 카드가 유력하다는 보도가 서방과 홍콩에서 나오곤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시진핑-리커창 조합으로 귀결됐고 보시라이는 충칭(重慶)시 서기로 이동한다. 현재 리커창이 맡고 있는 상임부총리를 꿈꾸던 보시라이로서는 충격이었고, 관가에서는 명백한 좌천으로 받아들였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가 좌천된 이유로는 우선 해외에서 파룬궁(法輪功)과 관련된 송사들이 꼽힌다. 보시라이가 랴오닝성장 시절 파룬궁 수련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을 이유로 파룬궁 지지들은 호주, 미국, 영국 등 10여개 서방국가에서 송사를 진행했다. 파룬궁에 대한 진압은 전국적으로 발생했지만 이들은 당시 차기 지도자로 꼽히며, 인기가 높고 상무부장으로서 해외출장이 잦은 보시라이를 집중타깃으로 잡은 것.
상무부장이란 직책은 테크노크라트이면서도 외교적인 성격을 띄는 자리다. 국제무대에서 빈번히 노출되며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 세계인들에게 중국의 이미지를 높여야 하는 책임도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보시라이는 매번 해외에 나갈나갈 때마다 파룬궁의 기소 관련된 뉴스를 우선 맞닥뜨려야 했다.
외국의 기자들은 상무부장에게 무역을 묻기보다는 파룬궁을 물었다. 보시라이가 난감해한 채 이마를 찌푸리는 모습이 TV영상에 자주 잡혔다. 난감하기는 보시라이와 함께 외국을 방문했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나 우이(吳議) 부총리 등 국무원 최고위층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들이 반감을 가진 인사를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내세울 수가 없었다는 분석이다.
◆충칭에서의 권토중래
좌천당하기는 했지만 보시라이는 정치국위원에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다. 공산당 지도부가 보시라이에게 기회를 완벽하게 박탈하지는 않은 것이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 서기로 안배를 받은 뒤에도 한참동안 상무부장으로 대외활동을 계속하며 충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제17차 당 대회 직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시진핑과 리커창, 당 중앙조직부장이 된 리위안차오가 베이징에 도착했고 위정성(兪正聲) 후베이(湖北)성 서기가 상하이 서기로 가는 등 임무 교대가 속속 이뤄졌지만, 보시라이는 11월 말까지 베이징에 눌러앉았다.
때문에 광둥(廣東)성 당 서기에 임명된 왕양(汪洋) 당시 충칭 서기와 부총리로 올라와야 할 왕치산(王岐山) 광둥성 서기 역시 자리를 옮길 수 없었다. 그해 11월13일 열린 충칭시 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체회의에서 열린 이•취임식에서도 보시라이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중앙조직부장 리위안차오가 보시라이와 함께 충칭에 도착한 것은 한참 뒤인 11월29일이었다. 이처럼 한달여 베이징에 머물렀던 것은 인사조치에 대한 항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충칭서기로서 보여준 보시라이의 행보는 재기를 향한 강한 집념으로 받아들여졌고, 2012년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임위원에 반드시 진입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지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인 의도를 떠나서도 보시라이의 업적은 빼어났다. 중국 인민들은 보시라이의 행보에 열광했으며, 그가 가는 곳에는 취재진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다.
그가 이제까지 해온 일은 크게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 충칭의 조직폭력배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한 것. 이로 인해 그는 인민들의 전국적인 지지를 받게 됐다. 또 한가지는 홍색캠페인을 강화한 것이다. 마오쩌둥 주석의 업적을 기리고 공산당의 기반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사용해 공산당내 원로그룹들에게 안정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냈다.
보시라이가 앞으로 할 일은 조화사회 건설에 앞장서는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소득분배의 불평등 문제 해소에 앞장서고 물가를 안정시켜 인민들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데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후진타오 주석의 정책방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율위, 정법위 서기 유력시
보시라이는 이 같은 인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에 성공적으로 입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정치학계에서는 “보시라이의 인기가 높아 그를 승진시키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가 됐다. 그를 상무위원에 올리지 않는다면 공산당 지도부가 승진시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말했다.
보시라이는 정치국 상무위원 중 현재 허궈창(賀國强)이 맡고 있는 중앙기율검사회 서기(공산당 서열 8위)나 저우융캉(周永康)이 맡고 있는 중앙정법위원회 서기(공산당 서열 9위)로 이동하는 모습이 유력해 보인다. 보시라이로서도 국가 주석이나 부총리, 국가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경쟁이 치열한 곳이거나 이미 내정된 인물이 있는 자리를 피해 중기위나 정법위로 올라갈 것을 염두에 두고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설명도 나오고 있다.
중기위는 공산당원들의 비리혐의나 위법행위를 조사감찰하는 준정부기관이며, 정법위는 정부의 감찰부문을 지휘하고 중앙군사위원회와 함께 인민무장경찰을 지휘한다. 정법위 서기는 사법부 장관과 최고인민법원 원장 등을 통솔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이 막강하다. 이미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인민들에게 강력한 법률집행 의지를 보여줬기 때문에 두 곳의 직책으로의 인사이동은 무난해 보인다. 권력의 견제를 위해 태자당의 대표주자 중 한명인 보시라이가 공청단파인 리위안차오와 함께 한 곳씩을 맡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보시라이는 내년이면 63세다. 그리고 19대 전국대표대회가 열릴 2017년이면 68세로 정년제한에 걸린다. 위정성이나 왕치산 등과 마찬가지로 2017년이면 어쩔 수 없이 은퇴해야 할 나이다. 때문에 보시라이는 내년 당 대회에서 반드시 상무위원에 진입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때문에 보시라이가 하는 정책들이 승진을 위한 정치적인 쇼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가 보인 업적에 대부분에 중국인들이 찬사를 아끼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보시라이가 내년 당대회에서 공산당 서열 6위인 국가 부주석에 오를 가능성도 예상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영웅칭호
보시라이가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은 2009년 3월 충칭시의 한 군부대 정문에서 보초를 서던 인민해방군 한 명이 정체모를 괴한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범인은 티베트 분리독립주의자의 소행일 것으로 여겨졌지만 폭력조직 간의 세력 다툼에서 피해자가 불의를 사고를 당했던 것. 보시라이는 그해 6월 측근인 왕리쥔(王立軍)을 충칭 공안국장에 기용, 대대적인 폭력조직 소탕전을 벌였다.
충칭시는 공안국 내부의 폭력조직 협력자부터 색출했다. 고위 간부 3명이 구금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동시에 충칭시 공안국은 범죄 소탕 임무를 맡은 경찰관 3000여 명에게 직무상 비밀에 대해 가족을 포함한 외부인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명령했다.
보 서기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3348명을 체포하고 63개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했다. 검거된 3348명 가운데는 충칭시의 검찰총장격이었던 원창(文强) 전 사법국장과 충칭시 경찰 조직의 2인자였던 펑창젠(彭長健) 전 공안국 부국장 등도 포함돼 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 200명이 옷을 벗었다.
이에 저우융캉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는 2009년 말 충칭을 들러 “충칭시의 조직폭력배 소탕은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인민들을 삶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격려했다. 또한 “충칭시 당과 정부 지도부의 지휘 아래 충칭시 공안 부서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찬사했다.
◆대륙을 홍색물결로
보시라이 행보에서 ‘홍색문화(紅色文化) 캠페인’도 빼놓을 수 없다. 홍색문화 캠페인은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정신을 배우자는 캠페인으로, 보 서기는 혁명가요 부르기, 마오쩌둥식 사회체험 프로그램 등을 잇달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충칭시는 지난해 8월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재학 4년 가운데 최소 4개월을 노동자, 농민,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는 사회체험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문화대혁명 시절의 하방을 연상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충칭 지역 TV의 황금 시간대에서 드라마를 몰아내고 ‘홍색 프로그램’을 방영시키도록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 서기가 공청단 출신의 경쟁자인 왕양 광둥성 당 서기에 비해 당내 기반이 취약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차기 국가주석으로 유력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충칭시를 방문해 ‘지원사격’을 해 주면서 보시라이의 정치력에 힘을 실어줬다.
`범죄와의 전쟁‘ `혁명가요 부르기’ 등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보 서기는 지난해 말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누리꾼들을 대상으로 벌인 ‘올해 책임감 있는 중국 10대 인물’ 평가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올해 초 관영 신화통신은 ‘함께 부유해지는 해법을 충칭에서 찾는다’는 기사를 실어 보시라이의 업적을 집중 부각시켜 그의 앞날을 밝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