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순천 촌놈' 인요한이 뿌린 씨앗

2024-01-07 15:30

[박종렬 논설고문]



5대째 이 땅에 뿌리내린 가족

“내가 웬만한 전라도 사람보다 더 징한 ‘전라도 사람 인요한’으로 살게 된 사연들의 기록이다. 나는 내 핏속에 흐르는 한국인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그 뜨거운 정이었다. 내 영혼은 한국 사람들의 그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에 길들여졌다.”(《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인요한, 2006. 생각의 나무)
 
130년 전 갑오년(1894년)은 갑오경장, 동학혁명, 청일전쟁이 한 해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천지개벽이라 할 미증유의 혼란으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갑진년인 올해는 1월 대만 총통선거를 필두로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만, 일본, 영국 등 20여 개국을 포함해 대한민국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그야말로 천하 대란의 시대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대로 새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기대를 모으는 것처럼 새 인물들이 정치판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 12일 만인 지난해 10월 26일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인요한(印曜翰·1959년 12월 8일~ )도 의외의 인물.

지난해 12월 1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 ‘지도부·친윤(친윤석열)·중진 의원들의 불출마·험지 출마(희생)’를 포함한 6개 혁신안을 백서 형태로 보고했으나 험지 출마·불출마론으로 지도부와 갈등 속에 현실정치의 벽을 못 넘고 혁신위는 예정보다 2주 먼저 40여 일 만에 '조기 종료‘했다. 그는 ‘혁신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기득권 깨기의 지난(至難)함을 보여 주고, “정치와 거리를 둘 것”이라고 했지만 “다양성 희박한 한국에서 정치판 흔든 미국인 아웃사이더”(WSJ, 2023.12.8.)로 ‘국적·이색 배경·폭넓은 스펙트럼 등 상징적 다양성 주목’으로 정치판을 뒤흔들었다. 혁신위 시작 때 “정치해 본 적 없고, 32년 동안 의사만 해서 공부할 게 많다”며 겸양 자세였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밥상머리 교육’ ‘구들방 아랫목 도덕교육’ ‘매 맞고 우유 먹을래’ 등 그가 툭툭 던진 정치적 메시지는 불멸의 어록(語錄)이 되었다.

인요한의 본명은 존 올더먼 린튼(John Alderman Linton). 한국 이름 성씨 인은 린튼의 린에서 따왔고 요한의 영어식 이름이 존(John)이다. 어린 시절을 대부분 전남 순천에서 보내 영어보다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했던 ‘개구쟁이 짠’이로 유명했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쥐불놀이하고 서리하러 다니던 순천 친구들이라는 그는 ‘특별귀화 1호’ 한국인으로 2012년 3월 21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년 귀화하면서 얻은 그의 본관은 ‘순천 인(印)씨’. 성씨 본관 등록 당시 순천 인씨 시조(始祖)가 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과 아버지 휴 린턴(인휴)을 가문의 시조 및 중시조로 삼고 있다. 한국에 5대째 뿌리 내린 그 집안의 120여 년 가족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 고종 때인 1895년 4월 8일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이자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인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裵裕祉·1868~1925)이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 가족은 전라북도 전주에 정착했고, 광주·목포 지역에서 현재까지 4대째 선교 및 교육사업을 펼쳐왔다. 1959년 한남대학교 전신인 대전대학을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세웠고, 유진 벨 재단을 출범시켜 북한 결핵 퇴치를 위주로 한 의료 지원에 400억원 넘는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지원했다.

인요한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인돈·1891~1960)은 유진 벨 선교사의 사위다. 미국 조지아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모친 사망 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이던 1912년 한국으로 왔다. 이후 48년간 전주와 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 의료봉사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를 맡았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후원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외국 신문을 통해 전파하는 등 해외 홍보를 주도했다. 군산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거부로 고초를 겪은 공로로 2010년 3·1운동 91주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 휴 린턴(인휴·1926~1984)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났다. 미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한국인 포로를 돌봤다. 전라남도 지방 도서 및 농촌 지역에 612개 교회를 개척했고, 6·25전쟁 당시 대위 계급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선교활동을 하다 순천에서 음주운전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의 형인 스티브 린턴(인세반·1950~)은 한양대 교수를 지냈고, 1995년부터 북한 결핵 퇴치 및 의료 지원을 해오고 있는 ‘유진벨 재단’ 회장직을 맡고 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결핵 진료소 200여 개를 세우고, 어머니는 호암재단 상금 1억원으로 구급차를 사 기증했다. 인요한은 1997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총 29번 방북한 남다른 기록도 갖고 있다.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
 
1980년대 초반 20대 전라도 출신 열혈청년이었던 그는 연세대 의대 1학년 재학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만난다. 그는 당시 대사관 직원을 사칭해 검문소 7개를 거치며 참혹했던 광주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또 <뉴스위크> 등 광주 시민군의 외국 언론 기자회견장에서 5·18 진실을 알리는 영어 통역을 했는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 때 추방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찍혀 2년여 보안사 요원의 사찰 대상이었다.

1987년 연세대 의대에서 학사·석사(1992년)·의학박사(1996년), 1990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 석사 등을 취득했다. 1991년 연세대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조교수로 시작해 의료인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부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직을 맡고 있다. 2015년에는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 대한민국 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제4대 한국 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를 맡아 본격적으로 현실 참여에 나섰다.

한국 지형 맞춤형 구급차 개발

1984년 4월 10일 인요한은 부친상을 계기로 한국형 앰뷸런스를 최초로 개발하면서 한국 응급의료학의 초석을 놓았다. 아버지가 순천에서 교회 물품을 싣고 오다가 만취한 기사가 운전하던 관광버스에 치여 중상을 입었을 때였다. 당시 구급차가 없어서 큰 병원이 있는 광주광역시로 택시 뒷좌석에 실려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1992년 미국 남장로교 측에서 받은 부친 추모 자금을 바탕 삼아 미국 구급차 구조를 본떠 국산 승합차를 개조한 구급차를 제작해 고향인 순천소방서에 기증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가 장차 정계 진출을 이뤄 대한민국 국회의원, 외교관 등으로 임용된다면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직은 짐작하기 어렵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41위인 한국 축구를 조련해 ‘4강 신화’를 달성하면서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처럼 그의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는 여론도 있다.

쿠바의 체 게바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와 함께 의사 출신으로 세계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쑨원(孫文)은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더 나은 의사는 사람을 고치며, 진정으로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고 했다. 캐나다 출신 외과 의사로 스페인 내전과 중공의 항일투쟁에 참전한 의료개혁가 노먼 베순은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이는 소의(小醫),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이는 중의(中醫),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해 그 모두를 고치는 이가 대의(大醫)”라고 했다. 이들이 혁명이나 사회개혁에 헌신하게 된 것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다가 아예 그 질환을 앓게 만든 사회적 병리를 고치기 위해 온 몸을 던진 것이다.

의사 출신인 그 역시 본업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발한 사회 참여를 해왔다. 그렇다면 그는 ‘하와이’에서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다양한 인종·문화적 경험과 아웃사이더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처럼 될 것인가?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2023년 귀화인·이민자 2세·외국인을 합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30만여 명(전체 인구 중  4%)에 이르는 현실에서 인요한의 출현은 선진국이라면서도 막다른 길, 즉 ‘아포리아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계에 신선한 자극을 준 것은 명백하다.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

천마산 자락에서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해 세상사를 두루 살핀다는 중찰인사(中察人事)에 능한 노선사(老禪師)는 “앞으로 대의(大醫)가 출현해 병란(兵亂)을 병란(病亂)으로 불의 무도한 천하를 바로잡는 광구천하(​匡救天下)에 나서 남북이 자유 통일돼 대한민국은 대륙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엄청난 일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다. 광구천하가 되면 웅비(雄飛)하는 한민족 시대가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전제하고 “일제의 분열정책에 따라 100여 년 동안 국민학교에서부터 청백군으로 나눠 싸움만 훈련받아온 한국인에게 히딩크 같은 용병(傭兵)을 모셔 대한민국의 판을 다시 짜야 할 때가 왔다. 모소대나무는 100년이 지나야 꽃이 핀다는데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고 잠룡이 꿈틀거리고 있다”며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며 말을 아꼈다.

스님이 예로 든 모소대나무는 희귀종 대나무로 일명 모죽(毛竹)이라 불린다. 이 대나무는 땅이 척박하든 기름지든 파종 후 4년 동안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3㎝밖에 자리지 않는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손가락만 하던 죽순이 갑자기 하루에 30㎝ 가까이 쑥쑥 자라며 폭발적으로 성장해 대략 6주가 지나면 15m 이상 자라나 텅 비어 있던 대나무밭이 빽빽하고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하며 ‘비약적인 발전(quantum leap)’을 이룬다. 황무지에서 불과 두어 달 사이 엄청난 높이의 대나무 숲을 형성한다.

인요한 집안은 장장 4대에 걸쳐 128년 동안 대한민국 남쪽 지방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외증조부 유진 벨은 목포에 영흥남학교와 정명여학교(1903년)를 세웠고, 1907년 광주에 ‘유일한 하나님만을 섬긴다’며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숭일(崇一)학교와 1908년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했다. 광주 최초 병원인 재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송정리교회(1901년), 해남군 우수영교회(1902년) 등 전라도에 600여 개 교회를 설립했다.

인요한의 국내외 인맥 역시 다양하다. 백수(白壽)를 다하고 지난해 12월 1일 작고한 키신저가 방한 중 복통이 났을 때 치료했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카터, 클린턴, 부시와도 남다른 교류를 맺고 있다고 한다. ‘통합과 화해를 실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멘토로 존경한다는 그는 ‘민주당이 김대중 정신을 잃어버렸다’며 민주당은 한 번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덕망과 경륜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해 은인자중(隱忍自重)하고 있는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국회의장)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교장을 지낸 전주 신흥고 출신이라고 자랑하는 그는 “좋은 분으로 큰어른으로 모신다”며 ‘훌륭한 대통령감’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예수가 등장하기 직전 세례를 베풀던 구약 시대 최후의 예언자 요한의 이름을 딴 그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의 귀추가 주목된다. 임채청 동아일보 사장,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한 풍력발전 타워(기둥) 세계 1위 ‘씨에스윈드’ 김성권 회장도 신흥고가 배출한 인물. 조수진 의원도 인요한의 조부모가 교장을 지낸 전주 기전여고 출신으로 사석에서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숭일고 출신으로는 팔로군(현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영길 장군, 최초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로 전설적 영화감독이 된 임권택이 있고, 서편제 여주인공 오정해는 목포 정명여중 출신. 수피아여고는 현해탄을 넘나들며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날린 김연자, 1970년대 유명 MC 최미나(허정무 축구 감독 부인)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8대 대선 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해 호남 유세 때 지지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 여성 대통령론'을 편 그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 부위원장도 지냈다.

모소대나무는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데, 인요한 가문이 4대에 걸쳐 ‘마땅히 머무를 바 없이 마음을 낸다(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는 정신으로 이 땅에 뿌린 교육과 의료, 선교의 씨앗들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순천 인씨’ 시조인 인요한 박사의 향후 거취가 주목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