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뭐할까] 시각 예술로 연결한 퀴어의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
2021-11-19 06:00
이강승 작가 개인전 ‘잠시 찬란한’, 12월 31일까지 갤러리현대
“한국 퀴어 커뮤니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시각예술의 언어로 연결해보고자 하는 시도를 지속해왔습니다. 새로운 ‘퀴어 미래’를 상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예우하고, 서사를 창출함으로써 우리의 현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세대 간의 연결을 만들면서 시공을 가로지르는 시도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백인·남성·이성애 중심의 주류 역사에 도전하고, 그 서사 속에서 배제됐거나 잊힌 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작업을 전개해온 이강승 작가가 국내 대표 화랑 갤러리현대에서 전시를 연다.
갤러리현대는 오는 12월 31일까지 이강승 작가의 개인전 ‘잠시 찬란한(Briefly Gorgeous)’을 개최한다.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며 미술·공예품 컬렉션, 미술대학 도서관, LGBTQ 단체 등의 공공 및 민간 아카이브를 역사학자처럼 집요하게 조사 및 연구한다.
이러한 탐구 과정에서 에이즈(AIDS) 대위기나 LA 폭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특정 인물 로버트 메이플소프,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피터 후자, 마틴 웡, 데릭 저먼 등 앞선 세대의 예술가부터 오준수 등의 게이 인권운동가까지 에 관한 도큐먼트를 재발견하고, 그들이 세상에 남긴 문화적 예술적 정치적 기여와 유산을 동시대의 관점에서 오마주하며 재맥락화한다.
갤러리 건물 외벽의 5.6×8.26m 크기의 대형 빌보드에 나란히 놓인 두 점의 흑연 드로잉은 ‘잠시 찬란한’전에서 후렴구처럼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이다.
이번 전시의 주요 인물인 예술가 쳉퀑치는 1980년 9월 션 맥쿠웨이트의 모습을 폴라로이드로 촬영했고, 이를 포스터 형식의 작품으로 전환해 동료였던 키스 해링이 기획한 전시에 출품했다.
당시 19살의 전도유망한 청년 예술가였던 션 맥쿠웨이트는 1970~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창의적 활동의 중심지로 후대 문화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클럽 57’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션 맥쿠웨이트의 게이 동료 대부분은 HIV/AIDS 관련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존재도 잊혀져 갔다.
이강승 작가는 과거를 예우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쳉퀑치에 관한 드로잉 연작을 제작하며 키스 해링의 개인 소장품 경매에서 이 원본 포스터 작품을 구매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사진의 주인공인 션 맥쿠웨이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연락을 취해 협업을 제안한다.
클럽 57의 멤버 중에서 거의 유일한 생존가인 션 맥쿠웨이트는 HIV 관련 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 한계 속에서도 이강승 작가와의 논의를 거쳐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19살의 발레 댄서였던 자신이 만들어 입은 쳉퀑치 사진 속 의상을 41년 만에 재제작하기에 이른다.
1층 전시장에 이강승의 소장품인 쳉퀑치의 오리지널 포스터 작품과 션 맥쿠웨이트의 의상이 함께 전시되며, 2층 전시장에는 션 맥쿠웨이트가 이 의상을 입고 1980년 쳉퀑치 앞에 선 듯 정지된 모습으로 힘겹게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 ‘무제(션 맥쿠웨이트) Untitled (Shawn McQuate)’, 쳉퀑치가 애초에 션 맥쿠웨이트의 모습을 폴라로이드로 촬영한 것처럼 사진가 루카스 마이클이 이강승과 협업해 촬영한 폴라로이드 초상 사진, 그리고 이강승이 쳉퀑치의 사진을 드로잉으로 옮겨 그리고 이를 태운 작품이 병치된다.
이 작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고민했다”라며 “션 맥쿠웨이트와 관련된 작품에서 수익이 나오면 그와 배분하기로 협의를 했다”라고 설명했다.
1층 전시장은 국경, 문화, 세대를 넘어서는 만남이 이어진다. ‘잠시 찬란한’전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 혹은 퀴어 공동체로 향하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185 x 153.5cm 크기의 대형 나무 패널 작품 세 점 ‘무제(Untitled) 1, 2, 3’에는 이강승의 회화, 사진, 삼베 금실 자수, 흑연 드로잉 이외에도 전시 출품작의 레퍼런스가 된 선배 예술가와 동료 예술가의 작품과 기록물, 퀴어 공동체의 공적 사적 아카이브, 잡지의 표지, 각종 보도사진 등이 섬세하게 배열됐다.
1층 전시장 한쪽에 놓인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아티스트북들은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첫선을 보인 바 있다. 어느 트랜스젠더의 일기장, 한국남성동성애자 인권단체인 ‘친구사이’의 창립 멤버였으며, 1998년 에이즈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 성소수자 인권 그리고 에이즈 환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한 오준수의 스크랩북, ‘선데이 서울’의 왜곡되고 선정적인 기사들, 퀴어락(QueerArch)이 20여 년에 걸쳐 소장한 1700여 점의 퀴어 관련 서적, 잡지, 논문 등의 표지를 스캔하고, 이 이미지를 논문집과 스크랩북 형식의 책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작가는 “잘못된 기사가 퀴어의 역사를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2층 전시장에는 쳉퀑치, 고추산, 션 맥쿠웨이트, 익명의 트렌스젠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흑연 드로잉과 영상 작품,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 피어, 한국 서울의 파고다 극장과 극동 극장 등 국내외 퀴어 공동체의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를 담은 드로잉, 의식을 행하듯 서로 다른 장소의 흙을 조합해 만든 세라믹 타일과 그릇, 새로운 ‘퀴어 미래’를 상상하며 작성한 미래 완료형 시제의 문장을 삼베에 금실 자수로 새긴 대형 설치 작품이 소개된다.
지하 전시장은 음악이 흘러 나오고 디스코볼에 비춰진 조명이 별빛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는 퀴어 댄스 클럽으로 변신한다.
중앙 벽면에는 대형 회화 ‘무제(킹 클럽) Untitled (King Club)’이 자리 잡고 있다. 이태원의 유명 게이 클럽인 킹 클럽의 금색 왕관 모양의 로고를 변형 회화로 제작하고, 여기에 시중에 유통되는 물감 중 금색이라는 이름을 가진 100여 개의 물감을 수집하고 이를 퍼즐 형태에 맞춰 칠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