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단군 이래 최대 뇌물 750억원과 돈냄새의 인문학

2021-10-14 17:11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사진 연합뉴스]]


검찰이 13일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의 구속영장에 750억 뇌물 공여 혐의를 적시(摘示)했다. 이 액수가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이 되면, 개인이 준 뇌물로는 ‘단군 이래 최대 뇌물’이 될 판이다. 검찰에 따르면, 내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김만배씨는 유동규(전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씨에게 2015년 대장동 개발 이익의 25%를 주기로 약속하고 사업자 선정에서 특혜를 받은 혐의가 있다. 그 25%가 700억원이며(이 돈은 약속만 되어있는 상태일 수 있다), 거기에 곽상도 의원 아들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준 50억을 더하여 750억원이다.

대한민국 뇌물 챔피언은 노태우

뇌물 액수 중에 역대 최고 기록보유자는 노태우 전대통령이다. 그는 33개 기업대표에게서 2708억원을 받았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32개 기업대표에게서 2206억원을 받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의 뇌물규모는 집권 권력자로서 여러 기업에게서 받아낸 액수를 가리킨다. 개인이 개인에게 750억을 준 혐의는 이 나라 역사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뇌물 수수 액수의 신기록에 흥분하여 ‘단군 이래 최대’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은 다소 부박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화천대유와 관련한 비리(非理)가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주는 게 사실이다.
 

[2004년 박근혜 여당대표 시절 노태우 전대통령을 방문했을 때.[사진 연합뉴스]]


그런데 단군시대에도 뇌물이 있었을까

뇌물사건과 관련해 단군을 거명하니, 과연 단군시대에도 뇌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국조(國祖)가 다스리던 고조선시대의 뇌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신성한 시대에 무슨 뇌물이 있었겠느냐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기원전 3200년부터 시작된 고대 이집트(우리 고조선과 시대가 비슷하다)에도 뇌물에 대해 골치 아파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성경의 잠언에도 뇌물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뇌물은 요술방망이 같아서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잠언 17장8절) “선물은 앞길을 여는 물건이며 높은 사람에게로 인도해준다.”(잠언 18장 16절) “은밀히 안긴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몰래 바친 뇌물은 분노를 사그라뜨린다.”(잠언 21장14절)

중국 후한(25~220)말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어찌나 성행했던지 ‘삼국지’에 관직별 시세가 기록될 정도다. 1506년 중국 명나라에 일어난 유육(劉六)과 유칠(劉七) 형제의 반란은, 뇌물을 거부하다가 일어난 사건으로 ‘뇌물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공에 술을 먹이니 배가 빨리 달리는구나

뇌물에 대한 옛사람의 생각이 담긴 기록도 적지 않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 ‘주뢰설(舟賂說, 뱃길 급행료 이야기)’라는 수필을 남겼다. 길지 않으니 전문을 소개한다.

“어느 날 남쪽지방을 여행하였는데, 도중에 큰 강을 만났다. 강나루에서 뱃삯을 주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때마침 강 건너는 사람이 많아서 두 척의 배에 나눠타고 동시에 출발했다. 두 척의 배는 크기가 같았고 노젓는 이의 숫자가 같았으며, 태운 승객의 수도 같았다. 두 배가 닻줄을 풀고 노를 젓기 시작했는데 조금 뒤에 보니 곁에서 같이 출발한 배는 날 듯이 강을 건너가서 이미 저쪽 나루에 도착하고 있었다. 반대로 내가 탄 배는 아직도 이쪽 나루 근처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상히 여겨서 까닭을 물었더니 함께 배 탄 사람이 이르기를, ”저 배를 탄 이들은 술을 싣고 가다가 노젓는 이에게 건네니 뱃사공이 힘껏 노를 저었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나는 무안해진 얼굴로 한탄했다. 아, 이 작은 강을 건너는데도 뇌물을 먹이고 안먹이는 것에 따라 빨리 건너고 늦게 건너는 차이가 있으니, 하물며 바다같이 험한 벼슬길을 다투어 건너는 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는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뇌물을 줄만한 사람도 없는 까닭에, 지금까지 조그만 벼슬자리 하나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구나. 뒷날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으려, 이것을 기록해둔다.”

좋아하는 생선을 계속 먹으려면, 생선 뇌물을 받아선 안되지

노나라의 재상 공의휴는 생선을 무척 좋아했다. 한 나라의 제후가 그에게 생선을 선물로 바쳤으나 받지 않았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생선을 좋아하시는데 왜 받지 않으십니까.” 공의휴가 대답했다.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다. 생선을 받고 재상자리에서 쫓겨나면 아무리 좋아하는 생선일지라도 내 스스로 먹을 수 없지 않는가. 생선을 받지 않으면 재상자리에서 쫓겨날 일도 없을 것이니 오래도록 생선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 중국 전한시대 유안이 쓴, 회남자의 ‘도응훈(道應訓)’

뇌물은 걸렸다 하면 모두 처벌대상

이 땅의 현행법에서 뇌물은, 줘도 범죄(증뢰), 받아도 범죄(수뢰), 미리 받아도 범죄(사전수뢰), 나중에 받아도 범죄(사후수뢰), 다른 사람이 대신 받아도 범죄(제3자 뇌물공여), 다른 사람 일로 줘도 범죄(알선수뢰)이다. 뇌물과 연관된 행위는 모두 처벌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정권이 바뀐 뒤에 전정부를 단죄(斷罪)하는 방식은 거의 대부분이 뇌물을 적발하는 일이었다. 부정부패의 전형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인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도 수뢰였다. 박 전대통령과 최순실씨는 3개 기업으로부터 245억의 뇌물을 요구했거나 받은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다. 이명박 전대통령도 다스 소송비 등 뇌물 94억원을 받아 감옥에 갔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퇴임 후에 곤경을 겪었던 ‘박연차 게이트’도 이 기업인이 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50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핵심이었다. 이 일에 노무현 전대통령이 개입되었는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정권 교체기는 거의 어김 없이 '뇌물 파동기'로 점철해왔다. 새 정부는 전 정부의 '부패'를 때리면서 그 반사의 힘으로 참신함의 탄력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렇게 태어난 정부는 금방 그 쳇바퀴 도는 듯한 역사를 까먹고 다시 오만과 방심으로 '심판 받을' 빌미를 만들어 주고마는 게 더 신통하다.

김영란법과 세종대왕 양벌법

아참, 이런 고리를 원천적으로 끊고, 금방 살아나는 부패를 촘촘히 감시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15년 3월27일 제정된 김영란법이 그것이다. 그 3년 전인 2012년 김영란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 공직사회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취재로 발의한 법안이다. 이 법은 공직자가 직무 관련성이 없는 사람에게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았을 때는 대가성이 없어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해놨다. 대가성이 증명되지 않는 스폰형 뇌물을 처벌하겠다는 의지였다. 스폰형 뇌물은 선물인지 뇌물인지 아리송한 '경계의 뇌물 수법'이다. 이런 것조차도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 6년 뒤인 2021년 단군 이래 최대 뇌물이 등장했다는 건, 어떤 의미로 봐야 할까.

조선 초기 세종대왕은 만연한 뇌물 풍조를 뿌리뽑겠다며 팔을 걷고 나섰다. 1424년 여름이었다. 왕은 '뇌물을 받은 자와 준 자를 모두 처벌한다'는 양벌(兩罰)법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뇌물을 준 자는 엄격히 처리하되 뇌물을 받은 쪽에는 관대했던 점을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법규는 무디고 더디며 부패는 생물처럼 진화하는 게 문제다. 조선왕조실록엔 뇌물 관련 사건이 3000건이나 기록되어 있다. 뇌물조선이라 할 만했다. 세종이 지하에서 통곡할 노릇이다. 어리석고 누추한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대장동 의혹이 심상찮은 까닭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이 오간 대장동 개발 의혹에는 여러 갈래의 ‘뇌물사건’들이 똬리를 트고 있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임기말에 불거지고 있는 이 사건이 어디로 튈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간단히 접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은 이미 확연해지고 있다. 은밀하게 오간 돈들이 어디까지 밝혀질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조만간 어떤 형식으로든 드러나게 될 ‘뇌물의 사슬’이, 사업자와 권력자, 그 중간 거간꾼의 베일을 벗길 수 밖에 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뇌물’이라는 말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역사의 핵탄두가 얼마만큼의 위력을 지니고 있을지를 가늠하게 하는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