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진흙 속에서 피어난 고귀한 연꽃이 마음을 위로하네
2020-08-03 00:00
‘처염상정(處染常淨)’.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는 말이다. 연꽃의 성격을 고스란히 품은 이 말이 절절하게 폐부를 파고드는 이유는 아마도 코로나19 확산세에 심신이 지쳐있기 때문이리라. 가만히 서서 오롯이 연꽃을 바라보니, 일상의 갑갑함이 잠시나마 달아난다.
해가 뜨고 태양의 기운이 충만해지면 꽃잎을 열고, 해가 기울면 꽃잎을 접는, 태양을 따라 피고 지는 태양의 꽃, 연꽃을 보러 가야겠다. 7~8월은 연꽃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흙 속에서 고귀하게 피어나는 연꽃은 지금 이맘때가 절정이다.
세미원은 생태공원을 표방하면서 자연정화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화공원이라는 단어가 다소 낯설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입구를 지나면 작은 정자와 카페 그리고 연꽃박물관으로 구성돼 있다. 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부터 보고 가기로 한다.
연꽃박물관은 우리 문화, 역사 속의 연꽃을 심도 있게 다룬 박물관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정착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긴 세월 동안, 연꽃이 우리 선조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직접 볼 수 있다.
연꽃은 열매, 잎, 뿌리, 꽃 등 모든 것이 인간에게 유용해, 다양한 음식으로 활용되는데, 그 조리법도 간단하게 설명돼 있다. 웰빙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연꽃으로 만드는 음식 정보도 챙겨가자.
이제 공원으로 향한다.
세미원은 <장자>에 나오는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에서 세(洗)와 미(美)를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물을 보면 마음이 씻기고, 꽃을 보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백번 공감할 내용이다.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숙지하는 것이 좋다. 일단,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 공원 나들이에 도시락이 빠질 수 없거늘… 아쉽지만, 음식물로 인한 자연훼손을 막겠다는 취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앞선 공원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뾰족한 굽이 있는 구두나 카메라 삼각대처럼 지면에 꽂히는 것도 금지다. 지면이 파이거나, 식물이 상할 우려가 있기 때문. 구두 같은 경우 고무신을 빌려 신고 입장할 수 있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는 조금 곤욕스러운 과정일 수 있겠지만 이것도 음식물 반입과 마찬가지로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좀 더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고자 하는 관리자의 운영관이 담겼으리라.
약 18만㎡ 규모의 공원에 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들이 가득한 6개 이상의 연못이 자리 잡았다.
연못 둘레로 조성된 산책로도 구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걷는 맛이 좋다. 노을이 질 때면 아늑한 분위기가 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걷기에 딱 좋겠다. 산책하다 보면 장독대와 멋진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이 있다. 이곳 항아리의 뚜껑에 구멍이 났는데, 물이 솟으며 분수쇼가 펼쳐진다. 이것도 퍽 장관이다.
이처럼 자연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놔두면서, 과하지 않게 꾸민 분위기가 세미원의 매력이다.
조형물과 석조물들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여백을 채워, 운치 있는 공간이 된다. 좀 더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멋을 부렸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남기도 한다.
약 10년 전, 이곳은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쓸려 내려온 쓰레기들이 습지에 쌓여 큰 골칫거리였단다.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주민이 모이고, 환경단체의 도움과 지자체 지원으로 현재의 세미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왜 이곳이 환경정화 기능이 있는 공원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련, 창포, 연꽃 등 수생식물이 가득한 연못을 거친 물은 좀 더 깨끗해져서 한강에 합류한다. 이렇게 착한 공원이 어디 있을까. 정화기능에 관한 실험이 현재도 진행 중이며 시험재배로 다양한 품종 도입이 시도되고 있다.
난시로 애먹고 있었던 몇 년 전, 당시 세상 모든 게 흐릿해 보여도 연잎 사이로 핀 연꽃만은 뚜렷하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진흙 속에서 태어났어도 결국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로 깊은 인상이 남았다.
전주는 마한시대 이래 호남지방에서 규모가 큰 고을로 그 이름은 마한의 원산성에서 유래했다.
40여년 간 후백제의 수도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의 선조가 살았던 고향이라는 이유로 완산유수부로 개칭되기도 했다.
전주에서 볼거리로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덕진공원에 피는 연꽃이다.
전주 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팔달로변에 위치한 덕진공원은 고려시대에 형성된 자연호수가 1978년 4월 시민공원 결정 고시에 따라 도시공원으로 조성됐다. 취향정과 더불어 유서 깊은 곳이다.
14만8800㎡(약 4만5000평)의 경내에는 남쪽으로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연못과 북쪽의 보트장을 동서로 가로지른 현수교가 그 사이를 양분하고 있다. 그윽한 향이 풍기는 연못 중앙으로 아치형 현수교를 거닐면서 한없는 시정에 젖어볼 수 있다.
대대적으로 정비공사를 해 1998년부터 재개장한 공원의 특색은 흙 쌓기(마운딩) 시공으로 향촌의 작은 숲(언덕)을 연상케 하고, 전통 정자와 창포늪을 조성해 역사성을 극대화했다. 또 인공폭포와 목교를 설치해 자연 친화시설로 시민의 정서에 맞도록 조성했다.
단오절에는 연못물로 부녀자들이 아침 일찍 머리를 감고 한해 건강을 기원하는 단오 창포물 잔치로도 유명하다.
이 덕진공원 안에는 "어린이 헌장", "신석정 시비", "김해강 시비", "전봉준 장군상" 등 9개의 석조 기념물이 조성되어 연꽃 향기와 더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전주의 정취를 안겨주는 문화공간이 돼준다.
여름은 밤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여행지에서 하룻밤 머물면 그곳이 더 잘 보인다. 야경까지 좋다면 금상첨화다. 백제의 세련미와 애잔함이 가득한 부여 궁남지와 정림사지로 야경 여행을 떠나보자. 부여 궁남지(사적 135호)는 백제 왕실의 별궁 연못이다. 지금은 지역민이 사랑하는 공원이 됐다.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운동하는 주민들로 활기가 넘친다.
궁남지에 피어난 연꽃은 백제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부여의 문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과 넓디 넓은 능산리 고분의 푸른 잔디는 아이들이 뛰어놓기 좋다. 고란사 유람선을 타고 달리는 백마강의 정취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스럽다.
지도에서 궁남지를 찾아보면 가운데 동그란 호수를 중심으로 상형문자처럼 작은 공간이 가득하다. 이는 크고 작게 나뉜 습지다. 궁남지에 들어서자 수많은 수련 꽃봉오리가 반긴다. 해마다 7월에 부여 서동 연꽃축제가 열리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다.
습지를 지나면 둥그런 연못이 나온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 포룡정이 자리한다. 작은 다리를 건너 섬 안으로 가다 보면 연못에서 잉어들이 다가온다. 먹이를 달라고 뻐금뻐금 재촉하는 모습이 귀엽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포룡정에 앉아 연못을 구경하는 맛이 평화롭다. 연못에서 분수가 하늘 높이 솟구친다.
궁남지 물은 약 8km 떨어진 능산리 동쪽 산골짜기에서 끌어왔다고 한다. 무왕이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연못 축조 기술은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전파된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 궁남지 조경 기술이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됐다고 나온다.
습지를 산책하며 느긋하게 저물 무렵을 기다린다. 여행지에서 이처럼 여유롭게 보낸 적이 있던가. 바람이 곱슬머리 같은 버드나무 가지를 헝클어뜨린다. 시나브로 땅거미가 내려앉자 다시 포룡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리와 포룡정에 들어온 조명이 물에 비쳐 반짝반짝 빛난다. 빛과 어둠을 모두 끌어안은 연못이 더욱 신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