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협-극일’ 구상이 우려되는 이유

2019-08-08 18:51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경협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호언한 다음날(6일) 북한은 또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일 무역 갈등 국면에서 보름 동안 벌써 네 번째 도발이다. 실로 곤혹스럽다. 우리가 힘들 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도발이라니, 대체 북은 무슨 심산일까. 그동안 이 정부가 북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나. 대통령이 ‘김정은의 대변인’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국제사회에 대북제재의 해소를 부탁하고 다니지 않았는가. 북도 북이지만 이런 북과 손잡고 극일(克日)하겠다는 건 또 어떻게 봐야 하나.

북한의 도발은 한국 공군의 F-35 스텔스기 도입과 5일 시작된 한미훈련 때문이다. 지난 3월 청주비행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첨단 스텔스 전투기는 북의 재래식 전력을 무력화할 핵심 전략자산의 하나다. 올해 10여대가 실전 배치되고, 2021년까지 총 40대가 들어올 예정이다. 북은 6·25 전쟁 때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평양이 초토화됐던 기억 때문에 공군력에 관한한 트라우마가 있다. 우리가 6·25 때 북의 탱크에 당하고 오랫동안 탱크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과 같다. 북이 스텔스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그래서다. 북 내부에서도 스텔스기에 비하면 우리 전투기는 ‘오리’ 수준이라는 자조(自嘲)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한다.

김정은으로서는 북의 군부가 느꼈을 공포심과 무력감을 완화시켜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남조선이 F-35를 들여왔지만 우리는 신형 방사포(탄도미사일)가 있으니 시쳇말로 쫄지 말라고 군(軍)을 다잡았을 게다. 그래서 도발이 더 필요했을 거고. 실제로 두 번째 도발 때(7월 25일) 발사된 미사일(북한판 이스칸데르급 KN-23)은 사거리가 250㎞로 F-35가 배치된 청주 비행장을 타깃으로 상정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 재개도 염두에 뒀을 것임은 물론이다. 북은 과거에도 한·미 훈련 철이 되면 뭔가를 쏘긴 했지만 이번 도발은 F-35 스텔스기 도입과 직결돼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군(軍)에 대한 김정은의 장악력이 아무래도 김일성·김정일 때만 못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유추해본다. 9·19 군사합의까지 해놓고 이런 막장 행태를 보이는 건 군심(軍心)을 의식한 걸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그런 징후를 느꼈다. 그가 준비해 간 비핵화안이 트럼프에 의해 거부됐을 때 상기된 얼굴로 서둘러 귀국하던 모습은 김일성·김정일 치하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체제에 쉽게 균열이 생기기야 하겠는가마는 35세로 여전히 젊고 경력도 일천한 그의 앞길이 할아버지, 아버지 때와 같지만은 않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그 끝이 혼란일지 평화일지 우리는 모른다.

필자가 30년 넘게 취재 현장에서 경험한 북한은 3무(無) 국가였다. 신뢰, 정직, 감사(感謝)의 부재였다. 약속을 잘 안 지키고, 입장을 자주 번복하고, 아무리 도와줘도 고마운 줄을 몰랐다. 이런 북을 상대하려면 우리 측은 간도 쓸개도 다 빼줘야 했다. 퍼주면서도 뺨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역대 정권이 다 그렇게 북을 상대했다. 어떤 정권은 그런 행태를 고쳐보겠다며 상호주의를 쓰기도 했고, 어떤 정권은 햇볕으로 포용한다며 그 투정을 다 받아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좌절도 겪었지만 교훈도 얻었다. 교훈은 원로 석학 이홍구 전 국무총리(1994~1995)의 지론이기도 한 ‘상황의 이중성’ 이론 속에 오롯이 들어있다. 북은 우리에게 대결의 상대이면서 동시에 화해(통일)의 대상이므로, 대화를 하면서도 안보를 생각하고, 안보를 챙기면서도 대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대북정책에 관한한 ‘한국적 현실주의’의 정수로 본다. ‘상황의 이중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국 절제(節制)다. 대화와 안보 사이에서 항상 신중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남북관계가 왜곡될 수 있고, 자칫 남북 간 현상유지(status quo) 체제가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심할 경우 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상위체제로서의 동북아 현상유지체제도 깨진다. 우리가 그걸 정녕 원하지 않는다면, 그걸 감당할 힘이 없다면 참아야 한다. 절제가 우리 대북정책의 린치핀(linchpin)이 되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한·일 갈등에 대해선 많은 연구자들이 역사, 정치, 법리, 산업, 기술 등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여기에 감히 숟가락 하나를 얹는다면 남북관계 차원에서도 한번 보자는 거다. 필자는 국제체제론(international system theory)의 관점에서 과도한(절제가 작동하지 않은) 남북관계의 변경 시도가 한·일 갈등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아베정권의 반발이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그 기저엔 문 대통령의 담대한(창조적인) 남북 간 현상변경 노력에 대한 아베의 거부감, 바꿔 말하면 수용할 만한 도덕성(아량)과 역량의 결여가 깔려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베로선 그걸 ‘소외감’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하면 현상변경파와 현상유지파 간에 긴 ‘저강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 경협으로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문 대통령의 구상에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확신할 수 없는 김정은의 미래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기는 것도 두렵지만, 문 대통령의 창의적이긴 하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그 비전을 김정은과 아베가 수용하려들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선의(善意)가 과연 통할까.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벽도 많다. 본격적인 경협이 이뤄지려면 유엔의 대북제재부터 완전히 풀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한가, 내수시장이 빈약한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북한과의 경협은 또 어떻고.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세금만 퍼붓고 마는 건 아닌가. 솔직히 모든 게 우려스럽다. 이런 우려들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남북관계만 과도하게 밀어붙이면 더 치명적인 제2의 한·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내부의 친일 반일 갈등도 더 악화된다. 그것이 상호 연계된 동북아체제의 현실이고 구조다. 약소국의 비애이기도 하고. 어쩌면 지금은 ‘절제’에 뿌리박고 선 한국판 도광양회(韜光養晦)가 더 현책일지도 모른다.
 

날아오르는 '신형전술유도탄' 바라보는 북한 김정은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일 서부작전비행장에서 이뤄진 신형전술유도탄 발사를 참관했다고 조선중앙TV가 7일 보도했다. 중앙TV가 공개한 사진에서 김 위원장이 수행 간부들과 활주로 위에서 유도탄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