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인문학]박근혜정부 때, 적폐청산 맨먼저 외친 사람은 박근혜였다

2019-05-08 11:20

 

 




적폐. 낱말 하나가 정권의 존재 이유를 이토록 강력하게 드러낸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대중에게 흔히 쓰이지도 않던 이 말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파고들어 하나의 단호한 개념으로 자리잡았을까.

적폐란 말은 원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문제를 지적할 때 애용하던 말이었으며 상소문의 단골메뉴였다.

적폐란 말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발언에 등장하는 것은 1993년 11월 김영삼의 국회연설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안으로 30년의 적폐를 씻어내고 국제화, 개방화,세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김대중은 적폐의 기간을 좀 더 길게 잡았다.1999년 2월 제2 건국 다짐대회에서 그는 건국 50년간의 적폐청산과 국정의 총체적 개혁을 외쳤다. 김영삼이 생각한 적폐는 박정희 정권 이래의 군사정부가 벌여놓은 문제들이었고, 김대중이 거론한 적폐는 이승만 정권의 폭정까지도 포함시켰다.

이명박도 적폐를 외쳤는데, 이때의 적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가리켰다. 그는 2007년 대선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10년 동안 아마추어 정권이 쌓아놓은 적폐를 말끔히 씻어내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 때 적폐청산을 가장 먼저 언급한 이는 박근혜였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직후 이런 말을 했다. "오랜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적폐를 개혁하겠습니다."

2017년 문재인 대선후보는 박근혜가 이미 선점한 '적폐'란 말을 선거구호로 쓰는 것에 대해 살짝 고민을 했다. 그런데 이 말보다 강력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문 정부는 '적폐청산'을 강력한 정치개혁의 명분을 담은 슬로건으로 굳혔다. 

적폐(積弊)는 '오랫동안 쌓인 그릇된 것'을 의미한다. 폐(弊)는 '폐를 끼치다' 할 때 쓰는 그 '불편함'을 의미한다. 한자의 의미로 보면, '폐'는 해진 옷처럼 너덜너덜한 상태를 의미한다. 폐가 현실로 드러난 것을 폐단(弊端)이라고 한다. 특히 그릇된 정치나 정책이 폐단을 누적한 상태가 적폐다. 박근혜 당시 정부를 지목해 매섭게 '적폐' 비판을 한 사람은 2016년 8월의 이재명이었다. 호주를 방문한 그는 교민들을 상대로 일갈했다. "대한민국 기저에 깔려 있는 친일, 독재, 부패의 쓰레기를 한번쯤 청산해야 합니다." 저 쓰레기란 표현이 적폐와 절묘하게 통하는 말이다. 적폐는 쌓인 쓰레기처럼 일소(一掃, 싹 쓸어버림)하거나 청산(淸算, 깨끗이 정리함)하는 대상이다. 

이제 정부의 과거 청산 개혁에 반대하는 정파는 '적폐세력'이란 꼬리표를 단다. 문재인 정권이 적폐에 포함시킨 과거정치는 임시정부 이후의 100년간 행해진 '정치적 나쁜 선택' 전체이다. 친일파와 분단세력, 독재세력 전반을 아우른다. 적폐의 범위가 넓어지다 보니 청산할 대상이 넓어졌고, 그 저항이나 반발도 만만찮아졌다.

적폐를 소탕하는 정치적 승부는 권력의 강력하고 집요한 의지가 그 성과를 좌우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사를 좀 더 통시적으로 살핀다면 정부가 주창하는 '적폐'의 정의(定義)가 국민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는 데 있을 수 있다. 적폐가 단지 자신의 진영(陣營)에 맞서는 이념 전체를 포함하거나 스스로의 정치적 정책적 행위에 반대하는 세력을 매도하는 데 쓰인다면, 그 청산의 명분을 지속적으로 얻기 어렵다. 적폐가 진짜 적폐냐, 공평무사한 역사적 잣대로 잰 것이 틀림없느냐의 문제다. 적폐가 일방적 정치 책략 속에 포함되는 순간, 그 주체가 다시 적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역설 또한 저 말 속에 담겨 있는 삼엄한 진리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