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2007년 여름 피서지에서…시진핑, 후계자로 낙점

2018-07-31 06:00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⑪
여름철 최고지도부, 베이다이허 비공개 회의 개최
'장쩌민, 주룽지, 시진핑 배출' 상하이는 中 권력의 중심
시진핑 상하이서기 시절 '공직풍토' 정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아주경제DB]


지금 우리나라는 연일 계속되는 불볕더위로 펄펄 끓고 있다. 태풍이 쓸고 간 중국 대륙에도 40°C 넘는 폭염이 본격화됐다. 중국 수도 베이징의 예년 7월 평균 최고기온은 서울보다 약간 낮은 31°C지만 체감온도는 서울보다 높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베이징이 바다에서 150㎞ 떨어진 반(半)분지형 내륙지형에다 공기가 그리 맑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다.

​◆여름철만 되면 시진핑(習近平) 등 최고 지도부가 가는곳

중국의 청와대 격인 중난하이(中南海)는 바다가 아닌 호수다. 즈진청(紫禁城·자금성) 동쪽 곁에 위치한 중난하이 호반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청사와 국무원청사를 비롯 시진핑 등 정치국 상무위원 최고위층 관저들이 밀집해있다. 중국 최고지도부 여름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는 강이 아니라 해변이다. 베이징 동북쪽으로 279㎞ 떨어진 보하이(渤海)만에 위치한 피서지다.

베이다이허는 베이징에서 승용차로 3시간 정도 거리로 허베이성 동북부 항구도시 친황다오(秦皇島)시에서 서남쪽으로 16㎞ 떨어져 있다. 중국 최고지도자들은 7월말에서 8월초 약 보름 동안 베이다이허로 간다. 베이다이허에도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일절 차단된 서쪽 지역인 시하이탄(西海灘)에서 은밀한 피서를 즐기며 느슨하나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합의한 사안은 그해 10월 또는 11월에 개최되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의 형식으로 공개된다. 이듬해 3월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노선 또는 법제로 확정되는 패턴화되어 있다. 특히 ‘2’와 ‘7’로 끝나는 해 여름의 베이다이허는 치열하다.

향후 5년간의 정치국 상무위원을 포함한 정치국 등 중국 최고지도부의 인사와 주요 당과 국가의 정책 노선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07년 여름 베이다이허도 각별히 치열했다.

당시 회의에서 시진핑 당시 상하이시 서기를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대륙에 파다했다. 그러한 결정은 상하이 서기 출신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자신의 후배 상하이시 서기를 강력히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리커창(李克强) 당시 랴오닝성 당서기를 차기 후계자로 확신하다시피 보도해온 일본 매체를 비롯한 외신들은 “상하이방의 거두 장쩌민이 태자당의 시진핑을 천거하다니?” 낭설로 일축했다.

2007년 10월 26일, 시진핑은 예상을 깨고 리커창에 앞선 서열 6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됐다. 차기 최고지도자를 예약하는 순간이었다. 세계 언·관·학(특히 일본과 한국 매체)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이는 사실 ‘발칵 뒤집힐’ 사건이 아니었다. 중국을 조금만 알면 삼척동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팩트’ 였다. 한번 생각해보라. 중국 최대의 경제·금융·무역 도시 상하이시 수장과 일본이 한때 지배했고 일본기업이 투자를 많이 해 일본에서나 알아주는 랴오닝성의 수장, 둘 중 누가 앞서 있었겠나?

◆ 총구에서 나오던 중국의 권력···지금 상하이에서 나온다

중국은 상하이를 용의 머리, 창장(長江)을 용에 비유한다.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용의 머리를 자극하고 그 힘이 용의 몸통을 거쳐 꼬리(내륙)까지 부유해진다는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도 상하이가 근원지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중국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지만(槍杆子裏面出政權, 마오쩌둥의 명언), 덩샤오핑(鄧小平) 개혁·개방 이후 경제건설 지상주의 시대 '중국의 권력은 돈 많은 상하이에서 나온다'는 신조어도 가능할 만큼 상하이의 경제력은 막강하다. 2017년 말 현재 상하이의 경제총량은 중국의 수도권인 베이징과 텐진을 합한 것보다 1.2배 많다.

장쩌민 이후 현재까지 상하이 당서기 자리는 부정부패 혐의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 하나만 제외하고 중국 7룡(정치국상무위원) 자리에 오르는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다.

장쩌민 상하이 서기는 1989년 6·4 톈안먼 사태로 인하여 일약 중국 최고 권력자 공산당 총서기로 등극하였다. 장쩌민 휘하에서 상하이 시장이었던 주룽지(朱鎔基)는 상하이 서기로, 1993년에는 제1부총리겸 경제부총리인 상무부총리로, 1998년엔 국무원 총리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상하이 서기–상하이 시장’ 출신이 그대로 ‘국가주석 –총리’ 를 맡아 이른바 ‘상하이방 황금시대(1998~2002년)’를 구가했다.

주룽지의 후임 우방궈(吳邦國)는 1994년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관장하는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하고, 후진타오 시대 10년간(2003-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당서열 2위) 겸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격)을 역임했다.

우방궈의 후임 황쥐(黃菊)는 8여년간의 상하이 당서기를 끝내고 정치국상무위원(당서열 6위) 겸 상무부총리로 승진했다. 시진핑 상하이 당서기의 뒤를 이은 위정성(兪正聲)은 정치국상무위원(당서열 4위)으로 승진, 시진핑 시대 1기인 2013~2017년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국가자문회의 의장격)을 역임했다.

상하이 시장과 당서기를 10년간 장기 재임한 지한파(知韓派) 인사, 한정(韓正)은 2012년 10월 정치국상무위원(당서열 7위)으로 승진, 현재 중국경제 총사령관격인 상무부총리를 맡고 있다. 한정의 후임인 현직 상하이 당서기 리창(李强)은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였을 때 비서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시진핑의 친신(親臣)으로 전도양양한 차세대 지도자로 손꼽히고 있다.

장쩌민 이후 역대 상하이 당서기 역임 후 상황 일람표 참조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이처럼 승승장구한 역대 상하이 당서기의 관운에 비해서 랴오닝 당서기의 그것은 어떠한가? 랴오닝 당서기가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승진된 사례는 중화인민공화국 70년 사상 리커창 현 총리가 유일하다. 리커창 외에는 랴오닝 당서기가 정치국 상무위원은커녕 정치국 평위원으로도 승진한 사례마저 찾기 힘들다. 심지어 랴오닝성 2인자인 성장을 3여년간 (2001년 1월~2004년 2월) 역임하였던 이른바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薄熙来)는 2012년 10월 뇌물죄, 직권남용죄, 횡령죄 등으로 실각해 현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한족(漢族) 위주의 오랜 정치·역사·문화 풍토를 이어받은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만리장성 이북의 동북3성을 오랑캐 땅으로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만리장성 이남의 화중지역과 윤택한 상하이·저장·장쑤 등 화둥(華東)지역을 중시한다. 그리고 안정 속의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계왕개래’(繼往開來,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열자라는 뜻으로, 중국 최고지도층이 즐겨 쓰는 휘호)를 존중한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 당중앙이 '변방의 북소리' 랴오닝성 리커창을 중국 권력과 재력의 핵심 원천 상하이시의 수장 시진핑을 제치고 차기 최고지도자로 간택할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고 판단한다.

리커창의 후진타오 후계자설은 항일민족주의 정서가 농후한 시진핑 대신 ‘재패니즈 프랜드리’한 리커창의 황태자 등극을 바라는 일본 매체의 ‘자가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 매체의 정확성을 맹신해온 국내 일부 매체의 ‘묻지 마 일본 매체 따라 하기’가 초래한 오보라는 생각이 든다.

◆탐욕과 부패 5급수가 흐르던 상하이 공직풍토 정화

2006년 9월 24일 중국공산당 중앙은 중국판 공수처인 당중앙기율검사위원회(약칭, 중기위)의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 관련문제 초보적 심사상황 관련 보고>를 발표했다.

중기위 보고에 따르면 천량위는 상하이시 노동·사회보장국의 사회보험자금 위법사용 및 일부 기업주와의 불법이익 취득 연루, 중대규정 위반사건 연루 측근 인사 보호, 직무상 편의를 이용한 친족의 부당한 이익취득 등 엄중한 규정위반 문제에 관련됐다.

당 중앙은 <중국공산당장정> 및 <중국공산당기율검사기관사건검사공작조례> 관련 규정에 따라 중기위가 천량위에 대한 검사를 진행할 것을 결정했으며, 그를  상하이시 당서기에서 파면하고 중앙정치국 위원의 직무를 정지할 것을 결정했다. 같은날 중국공산당 중앙은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을 상하이시 당 서기대리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2007년 3월 23일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겸 저장성 군구 당위 제1서기는 상하이시 당서기 겸 상하이 경비군구 당 제1서기로 영전했다. 천량위 상하이 전 서기가 부정부패로 낙마하면서 빈자리를 메운 것이다.

시진핑 상하이 당서기의 첫 공식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지(聖地)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지 참관이었다.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개막됐다. 마오쩌둥, 허수헝(何叔衡) 등 13명(평균연령 26세)이 참석했다. 초기 전체 중국의 공산당원은 600여명에 불과했다. 2018년 현재의 8680만명에 비하면 그야말로 ‘성성지화 가이요원’(星星之火, 可以燎原 ‘하나의 작은 불씨가 퍼져 광야를 태운다’는 마오쩌둥이 애용하던 성어)’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진핑은 상하이의 부동산 부패부터 도려냈다. 그가 부패척결을 위해 진행한 첫 수술은 상하이 시내 최고가 골프장 톰슨(Tomson)과 그 옆에 건설한 호화주택 톰슨 리비에라였다. 특히 톰슨 리비에라의 분양가는 2007년 당시 ㎡당 11만 위안(당시 환율로 약 2000만원)으로 중국내 최고가였다. 집중 조사결과 톰슨 리비에라 사장의 배후엔 천량위가 있었다.

또 인궈위안(殷國元) 상하이 부동산국 부국장은 한 채당 300위안(5만원)으로 구입한 주택 30채를 포함해 거액의 불법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적발됐다. 이밖에 캉후이쥔(康慧軍) 푸둥신구 부구장도 초저가에 주택 24채를 구매후 8채를 팔아 1600만 위안을 남긴 것으로 발각됐다.  시진핑은 이들 부패 공직자를 전원 파면 후 사법조치했다.

시진핑은 ‘탐욕의 해악’이란 영상자료로 부패방지 교육을 실시했다. 영상속 인물들인 천량위 사건의 공범과 종범들은 수의를 입거나 철창에 기댄 채 참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권력이 있을 때 한탕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시진핑은 “관리들은 이 탐욕의 해악이란 영상자료를 거울삼아 처신을 삼가라”면서 “특히 돈과 성과 술에 특별히 주의하라”고 강조했다.

비록 시진핑의 상하이 당서기 재임기간은 7개월 4일간으로, 역대 최단 기록이었지만 시진핑은 탐욕과 부패의 5급수가 흐르던 '경제수도' 상하이시의 공직풍토를 3~4급수 정도로 정화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