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이재호, 중국화의 뿌리를 탐구하는 재중 한국인
2017-01-17 17:46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하이펑, 이 차 타이어 좀 봐줘. 어째 바람이 빠진 것 같아.” 이재호가 옆에 있던, 검은색 옷에 스포츠 머리, 수염을 길러 언뜻 보기에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 같은 건장한 사람에게 한 말이다. 반면 이재호는 흰 바탕에 녹색 줄무늬가 있는 티셔츠를 청바지에 넣어 입고 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색깔의 머플러와 모자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으니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중앙미술학원 선후배 사이로 매우 친하다. 2006년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화를 배운 이재호가 10년 동안 사귄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허하이펑(賀海峰)이다. 한 명은 중국화를, 다른 한 명은 현대화를 그린다. 한 명은 문예적이고, 다른 한 명은 현실적이지만 예술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해주었다.
‘서예 소년’, 중국행을 결심하다
보통 아이들과 달리 이재호는 일찍부터 번체자부터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서예로 한자를 한 자 한 자씩 가르쳐주었다. 글자를 익히는 것 외에 이재호는 아버지를 도와 종이를 깔고 먹을 갈면서 한쪽에서 조용히 글씨를 쓰는 것을 지켜봤다. 아버지는 이 운필의 서법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재호는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당시 한국에는 서예를 배우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학원비가 비쌌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이재호는 서예 선생님을 찾아가 배웠다. 이렇게 고등학교까지 계속했다.
3일 뒤, 그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 친구에게서 작업실 한 곳을 알아놨다는 전화를 받았다. 신이 난 이재호는 이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며 중국에서 중국화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친지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2006년 흥분과 기대 그리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재호는 베이징에 도착했다. 작업실은 중앙미술학원에서 멀지 않은, 화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쒀자(索家)촌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촐했지만 어쨌든 발 붙일 곳이 생긴 것이었다.” 이재호는 인테리어 업체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지불한 다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은 일을 처리했다. 두 달 뒤,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작업실을 기대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문 앞에 엑스자로 붙은 ‘철거!’라는 글자가 그를 맞이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중국에서 있을 집이 없어진 것이다. 시공업체에 전화했지만 전화는 벌써 정지되고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작업실을 찾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중앙미술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려면 우선 일년 동안 언어를 공부해야 했다. 한자를 많이 알기 때문에 중국어 배우기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태껏 배운 번체자가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됐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모르는 것만 못했다.” 이재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인터뷰시 그는 매우 유창한 중국어로 기자와 대화를 나눴지만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는 성조, 필획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일년 뒤 이재호는 중앙미술학원 석사과정에 합격했다. 그의 석사 지도교수였던 중앙미술학원의 천핑(陳平) 교수는 “그의 그림은 서예보다 못하지만 가능성이 많았다”고 말했다. 함께 시험을 본 40여 명의 학생 가운데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앙미술학원 중국화과에 합격했다.
그는 길고 긴 2년간의 침체기를 부단한 노력으로 이겨냈다.
완벽한 예술 속의 불완전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세계의 구축과 가장 추한 현실을 드러내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이재호의 작품은 아름다운 신호를 전달하고 이것으로 사회에서 불완전하게 흩어진 사람들을 위로한다.
석사과정 재학 시절, 반에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고 유일한 유학생이었던 그는 한국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조국은 물론 내 얼굴에 먹칠해서는 절대 안 돼”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수업에 제일 먼저 도착해 준비해놓고 제일 늦게까지 남아 교실을 청소하고 불을 끄고 나갔다. 한 번, 두 번, 그는 자기만 그렇게 하고 다른 학생들은 자기의 행동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내 행동을 통해 그들을 감동시키고 싶어 이런 일을 했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석사과정에 유일하게 ‘중국 사회 개황’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불법 영업 차량인 ‘헤이처(黑車)’를 타고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헤이처 뒤에 있는 사회 문제와 이들 문제의 더 깊은 원인을 이해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운전면허 취득이 매우 쉬웠고 기사 등록도 없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이재호는 또한 사거리가 교통이 매우 혼잡하고 사고 다발 지역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행인 보행 신호와 차량 좌회전 신호가 왜 동시에 진행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녹색 신호등 시간이 너무 짧아서 행인은 빠르게 건너면서 좌회전 차량도 조심해야 했다. 너무 무서웠다.” 그는 그 사회 과목의 조사 보고서를 열심히 작성했다. 학교를 통해 관련 부처에 반영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보세요. 십년이 지났지만 내가 말한 그 사거리는 여전히 ‘뒤죽박죽’이에요.” 이재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화를 통해 그와 다른 예술가 간 가장 큰 차이점을 알아냈다. 그는 창작활동과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 더 관심이 많고 어떤 의미에서는 조화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청결하지 않은 화실을 못 견디고 예술가들이 사소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한다. 그는 자신은 사회에 사는 보통 사람이고 창작은 자신의 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니 보다 강렬한 수단이나 풍자의 방법으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는 “예술의 가치는 사람들의 마음속 감정을 환기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실현하고 싶다고 했다. 생동감 있는 자연 풍경과 조화로운 산수를 볼 때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애정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그가 전달하고 싶은 예술의 아름다움이고 조화의 아름다움이다.
제2의 고향이 된 중국
2017년은 이재호가 중국에 온 지 11년째 되는 해다. 얼마 전 그는 재중 한인미술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중국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생활하고 공부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 예술가로 구성된 재중 한인미술협회는 중한 양국 예술가간의 교류 활동 촉진에 주력하고 있다. 이재호는 최근 중한 양국은 예술 문화 분야에서 매우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한 양국의 예술은 뿌리가 같기 때문에 교류 과정에서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재중 한인미술협회도 이런 다리를 놓아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창작하면서 더 많이 사람을 만나고 동시에 예술을 통해 양국 국민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한다.
중국에서 산지 오래된 이재호는 중국 사회에 융합된지 오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허하이펑은 그가 의리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요령을 부리는 적이 없었고 친구들이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재호도 이 친한 친구를 칭찬했다. “하이펑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제일 좋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작업실의 일부를 중앙미술학원에 시험보러 온 고향 학생들에게 내주고 숙식을 제공한다.” 하이펑은 자신이 예술학교를 개설해 아이들이 중앙미술학원 본과와 석사 과정에 합격되도록 돕는다. 가끔 이재호도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친다.
이재호는 한국에 있는 부인에게 감사와 미안한 마음이 크다.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서 일했기 때문에 한국 집으로 돌아가 지내는 시간은 늘 제한적이었다.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 아내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곳에서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십년 동안 칼을 간’ 이재호의 중국화에는 전통문화의 정취가 담겨있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더 높은 것을 요구한다. “중국에 와서 그림을 공부한 것은 내가 내린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대가의 작품을 보고 배울 수 있고, 많은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으며, 수많은 문화의 근원을 탐구할 수 있다. 나는 날마다 배움의 길에 서 있다. 이런 느낌이 정말 좋다.”
그는 떠들썩한 도시에서 벗어나 베이징 외곽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곳은 산을 기대고 물이 가까워 영감이 잘 떠오른다. 매주 한 차례 왕징(望京,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린다)으로 나와 일주일치 한국 반찬을 산다. 시간이 나면 골프를 치고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다. 예술가라는 호칭을 떼면 그는 중국 사회를 잘 알고 중국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사는 보통 사람이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