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1-16 18:35
차일혁, 북한 대신 대한민국을 택한 반공주의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이를 두고 ‘새로운 전쟁(a new war)’이 시작됐다며 크게 우려했다. 중공군 개입은 김일성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이용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서두르자 남침을 일으킨 김일성은 체제 위기를 느꼈다. 김일성은 부랴부랴 소련수상 스탈린(Iosif V. Stalin)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고,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부수상이자 외무상인 박헌영(朴憲永)을 급히 베이징으로 보내 파병을 요청했다.
이른바 김일성의 읍소(泣訴)작전이다. 소련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은근하면서도 강압적 파병 권유와 박헌영을 앞세운 김일성의 호소에 마오쩌둥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를 내세워 1950년 10월 25일 6·25전쟁에 전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중국을 지키고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조선을 돕는다”는 중국적 시각의 6·25전쟁인 ‘보가위국 항미원조(保家衛國 抗美援朝)’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의 길을 재촉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왔던 길로 다시 발길을 돌려 38선을 향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북진통일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전선은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남한 내에서는 빨치산들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남한 내에는 그동안 북한군 점령 하에서의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전선에서 미처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지리산과 전라남북도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대한민국 후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결과 엄연한 대한민국 통치하의 남한지역에서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곳에서는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빨치산들이 위세를 떨쳤다. 남한 주민들은 공포심으로 크게 떨었다. 그런 탓으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전방의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후방의 빨치산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중고를 겪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였다.
세 번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다시 내주는 1·4후퇴다. 이때는 대한민국 후방에서 빨치산까지 가세했다. 미국은 정부의 제주도 이전을 포함하여 사모아와 피지 등 남서태평양지역에 한국의 망명정부까지 검토했다. 그만큼 위급했다는 증거다. 적을 앞뒤에 두고 싸우는 형국이 됐으니 위기도 그만한 위기가 없었다. 전방에서는 쏘고 또 쏘아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맞서 싸워야 했고, 후방에서는 틈만 보이면 습격해오는 공산게릴라인 빨치산과 싸워야 했다.
그렇다고 전방의 국군을 대거 후방으로 돌릴 수 있는 여건도 못됐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에게는 전방의 적보다 후방의 적인 빨치산이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후방의 빨치산 토벌은 그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민심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경찰의 몫이 됐다. 치안도 중요했지만 빨치산 토벌을 통한 후방안정을 위한 전투경찰이 절실했다. 차일혁이 전투경찰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다. 그것도 전라북도 도지사와 도경국장 그리고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이 표면적으로는 권유를 내세웠지만 내심으로는 “꼭 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권(强勸)이 깔려 있었다. 전투지휘관으로서 차일혁의 명성은 도내는 물론이고 군과 경찰에까지 널리 알려진 까닭이다. 뛰어난 숨은 인재를 뜻하는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 아닐까 싶다.
차일혁은 국가적으로 이런 위급한 시기에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전북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게 될 제18전투경찰대대의 대대장이 됐다. 이른바 ‘빨치산 토벌대장’이다. 1950년도 다 저물어가는 12월 10일 상황이다. 차일혁은 북한이 남침했을 때도 이에 강력히 대응하는 태도를 취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북지구편성관구사령관 겸 서해안지구전투사령관으로 발령된 신태영(申泰英) 장군에 의해 육군대위로 임명된 후 전북지역에서 새로 편성되는 국군 제7사단의 장교로 활동하다가 북한군이 도내로 들어오자 구국의용대장으로 활약했다. 신태영 장군은 6·25전쟁 이전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과 제2대 육군총장 채병덕 장군에 이어 제3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군의 원로였다. 6·25전쟁 초기 많은 군 경력자들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장교로 임명됐다. 차일혁도 육군총장을 지낸 군 원로이자 전북지역편성관구사령관의 직함을 가진 신태영 장군에 의해 육군대위 계급장을 부여받고 반공전선에 뛰어 들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방위소령(防衛少領)’의 계급장을 달고 호국군 대대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육군대위 임명은 자연스런 조치였다. 이때가 바로 1950년 7월 상황이다. 이 무렵 북한군은 주력을 경부국도에서 미군을 상대하면서, 호남지역으로는 북한군 최정예사단으로 알려진 방호산(方虎山)이 지휘하는 6사단을 투입했다. 방호산은 중국팔로군 출신의 지휘관이었다. 북한군 6사단은 호남지역으로 우회하여 북한군의 최종목표인 부산의 서쪽관문인 진주와 마산을 통해 부산을 기습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차일혁이 구국의용대와 국군철수 이후 홀로 남아 ‘옹골연유격대’를 조직하여 맞선 부대가 바로 방호산의 6사단과 이후 전북지역에 편성된 북한군 치안부대였다. 북한은 남한 점령지역에 12개 치안연대를 조직하여 반공무장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운영했다. 전북지역에는 전주에 연대본부를 둔 제102연대를 두었고, 예하에 4개 대대가 있었다.
빨치산 토벌대장에 임명된 차일혁은 반공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의 전공 앞에 뭇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을 취재하며, ‘전투영웅’ 차일혁의 모든 것에 매료됐던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자신의 육필원고에서 차일혁을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항일무장전선(抗日武裝戰線)에서 스승 김지강과 김원봉(金元鳳)을 따르며 존경하던 청년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anarchist)로서 활약했던 차일혁은 자유를 말살하고 공산독재를 남한에 강제로 이식하려는 북한 김일성 공산집단에 드디어 ‘반공의 칼날’을 들이대며 맞섰다. 그러면서도 차일혁은 전투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가슴속에는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차일혁의 그런 내면에는 억압과 강제보다는 자율과 자유를 존중하며 중요시했던 아나키즘(anarchism) 정신이 스며있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던 시절 그가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오랜세월 함께 했던 대다수의 동지들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신채호, 이회영, 김좌진, 윤봉길, 이봉창, 김원봉, 그리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및 조선의용대 출신 동지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 8·15광복은 그의 인생항로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가 오랜 동지들을 따라 북한으로 가지 않은 것은 자율과 자유를 억압하고 말살하는 소련군정하에서 급격히 공산체제로 물들어가는 북한이 체질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율과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아나키스트들의 최대 적이었다. 일당독재가 당연시되고 국민의 자유와 자율이 보장받지 못한 북한의 공산독재는 차일혁에게 최악이었다. 차일혁이 북한으로 가는 동지들을 멀리하고 홀로 자유민주주의를 택했던 데에는 이러한 사상적 고민이 숨겨 있었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은 반공을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위해 빨치산 토벌대장 직책을 기꺼이 수락했던 것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와 자율을 신봉하는 아나키스트이자, 뜨거운 가슴을 지닌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며, 최고의 전투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활약상이 기대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