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 장병, “생사의 갈림길서 받은 한 달 월급 12달러”
2014-09-10 06:02
베트남전 파병 50년, ‘피와 바꾼 한국 경제성장’(상)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오는 11일은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50주년을 맞는다.
당시 한국은 공산주의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는 대한민국 5000년 역사상 첫 해외 파병으로 기록된다. 이에 못지않게 베트남전은 파병 장병들과 함께 산업역군들 또한 적지 않은 희생을 하며 한국 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던 사건으로, 경제적으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베트남전이 없었다면 근대화의 상징인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없었고 이 나라에서 쌓은 경험이 없었다면 중동 건설 붐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 1970년대 수출주도 경제의 기반이 베트남전 기간 중에 마련됐다는 분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담배도 국산만 피워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 등 140명의 국군 장병을 태운 해군 상륙함(LST)이 베트남으로 출발했다. 부산항에서 떠난 이들은 같은 달 22일 사이공(현 호찌민) 동쪽 붕타우에 상륙했으며 이로써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됐다.
파병은 1965년 8월 전투병으로 확대됐다.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 정부는 그해 8월 포항에서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했으며 이들은 10월 베트남 캄란만에 상륙했다. 청룡부대와 더불어 비둘기 부대, 맹호부대가 현지로 파병됐다.
파병 기간 내내 장병들의 하루 하루는 긴장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함께 작전을 하던 전우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니 언제 희생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지 알 수 없는 상황. 달력의 날짜를 하나씩 지워 가며 귀국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장병들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월급을 받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에서 지급하는 일반 장병의 일당은 미군 하사의 20% 수준인 1달러 90센트, 월급으로는 57달러 정도였다. 우리 정부는 파병 장병이 받는 월급 가운데 80%는 고국의 가족에게 강제 송금하도록 했기 때문에 장병들의 손에 쥐어진 실제 월급은 12달러에 불과했다. 담배와 술을 구입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장병들이 한푼의 외화를 아끼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들은 베트남에서도 대부분 아리랑과 신탄진 등 국산 담배를 피웠다. 양담배와 국산 담배의 가격 차이는 50센트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조금만 돈을 더 들이면 ‘질 좋은’ 양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파월 장병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국산 담배를 주로 피웠다. 목숨을 담보로 벌어들인 값진 외화를 연기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송금된 돈은 한국에 남아 있던 장병 가족들의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 귀국 후 자신의 결혼자금으로 쓰였다. 또한 이 돈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 내수 경제도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경제 개발 계획의 ‘종자돈’ 중 상당 부분은 이처럼 파월 장병들이 외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벌어들인 것이었다.
◆대림산업 베트남특수 물꼬 트다
군대 파병에 이어 국내기업들이 속속들이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들 기업 가운데 대림산업은 1966년 1월 우리나라 건설 업체로는 처음으로 베트남 현지 락자에서 공사를 따냈다.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한 항만 건설을 위해 파일을 박는 공사를 맡게 된 것이다. 공사 금액은 87만6000달러로 얼마 되지 않은 규모였지만 우리나라 해외 건설사에서는 큰 의미를 지닌 사업이었다.
먼저, 사상 처음으로 해외 건설로 외화를 벌어들인 사업이라는 것이다. 1966년 2월 한국은행에 입금됨 공사 착수금 4만5000달러는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벌어들인 첫 외화였다. 다음으로는 대림산업의 수주는 베트남 특수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다. 대림의 공사를 시작으로 현대건설, 한진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줄줄이 베트남에 진출하게 되었다.
대림산업은 베트남에 진출한 1966년부터 철수한 1975년까지 20여 건의 크고 작은 공사를 수행했다. 하지만 당시 임직원 가족들은 대림산업 직원들이 베트남으로 발령이 나면 ‘사지(死地)로 가는 길’이라며 회사까지 찾아와 울고불고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같은 분위기는 베트남에 진출한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당시 사장이던 고 이재준 명예 회장은 위험한 전쟁터에 남의 자식들만 보낼 수 있겠느냐며 1966년 막 입사한 맏아들 이준용(현 대림산업 명예 회장) 계장을 베트남 사이공 지점에 보내 근무하도록 했다.
현대그룹은 1966년 1월 캄란만 준설공사를 50만달러에 따내 삼환, 한양, 고려개발, 공영토건, 아주토건 등이 잇따라 베트남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업체들은 모두 대형공사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일단 공사를 따내고 나서 노하우를 배우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돌격식 사업이었다.
현대건설이 따낸 캄란만 준설공사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 준설공사 경험자가 한명도 없는 상태에서 공사를 따내고 계약한 지 한 달 만에 일본에서 준설선(현대 2호)을 도입했다. 배가 마련되자 정주영 회장이 직접 배를 타고 현지로 건너가 엉뚱하게도 기계공장 기능공들을 준설공사에 동원했다. 상식을 벗어난 공사였지만 현대는 호주를 비롯, 경험 많은 외국기업들이 먼저 맡아 죽을 쑤던 이 공사를 예정보다 앞당겨 끝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현대는 이 공사덕분에 메콩강 깊숙이 있는 빈통만 준설공사도 수의계약으로 따냈다.
노무자 진출도 활발히 이뤄졌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965년까지는 93명의 기술자가 건너갔으나 1966년에는 한 해 동안에 1만97명이 이 나라로 돈벌이를 떠나는 등 1975년까지 2만5287명의 민간 인력이 월남에 진출했다. 한국인들은 건설, 수송 외에 자수, 사진촬영과 현상, 카메라 및 시계 수리, 초상화 그려주기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기만 하면 가리지 않고 일했으며 특히 세탁업은 한국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