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양명학 권위자 정인재 교수"코로나 이후, 수평적 사고 존중하는 양명학서 답 찾아야"

2020-04-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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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질 세계질서에 맞춰 성숙한 태도로"

"굳어진 틀서 벗어나 더 높은 문화 이뤄야"

정인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양명학 연구의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1976년 국내에서 처음 번역했다. 그리고 30년 넘게 중국 철학 관련 수많은 책을 번역하다 2013년 자신의 이름으로 ‘양명학의 정신’을 펴냈다. 정 교수는 제자 최진석 교수의 강의실 ‘호접몽가’ 완공을 축하하러 동양화가인 부인 손정숙 여사와 함께 지난 24일 전남 함평을 찾았다. 사제간의 정담이 끝나자 요즘 인기 검색어인 양명학에 관해 인터뷰했다. 권위자답게 거침없었다.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건장한 체구에 총총한 눈빛이 인상 깊다.

 

정인재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진=손정숙 동양화가 제공]

- 양명학은 주자학과 어떤 차이가 있고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

“양명학과 주자학은 모두 새로운 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 한다. 새롭다는 것은 공자 맹자의 시원(始原)유학이나 한나라 시대의 경전유학과 다른 유학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자연과 도덕적 원리인 천리(天理)를 궁극적 실재(道)로 생각했다. 주자학은 한편으로 본성이 천리라고 하고(性卽理) 다른 한편으로 천리를 외적인 사물에서 찾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본성과 마음을 하나로 봤다(心性合一). 외적인 사물에서 천리를 찾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마음자체가 바로 천리(心卽理)라고 주장했다.”

-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왜 생겼고 당시 어떤 역할을 했나.

“중국의 명나라 시대에 왕양명(1472~1529)이 탄생했다. 당시 명나라 황제들은 무능하고 조정은 환관이 실세가 되어 전권을 휘둘렀다. 명 태조 주원장이 재상제도를 없애고 문서관리하는 환관을 통해 통치했다. 이후 환관은 실세가 돼 6부를 거의 장악하게 된다. 환관의 횡포를 고발하다가 20대 정장(궁정에서 시행하는 태장)을 맞고 세상을 떠난 대간(臺諫)을 위해 변호하다가 왕양명도 정장 40대를 맞고 겨우 살아남아 뒤에 용장으로 유배된다. 명나라는 당시 내우외환에 시달린다. 해안에 침입한 해구들이 약탈을 일삼고 가난에 시달린 백성들이 산속에 들어가 산적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왕양명은 37세에 귀주 용장으로 유배돼 열악한 환경에서 밤낮 사색을 하다가 어느 날 밤 갑자기 밖에서 도(道)를 찾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자기의 마음이 곧 천리라는 심즉리(心卽理)를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자학의 성즉리와 다른 양명학의 철학 핵심이다. 이를 토대로 당시 지식인들의 아는 것(知)과 행위(行])기 따로 노는 것을 비판하고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양명학은 벼슬 위주의 관학(官學)이 아닌 민학(民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양명학은 선비(士)뿐 아니라 농민 기술자 상인(農工商)까지도 실천할 수 있는 철학이 됐고 나무꾼, 도공들 사이에서도 양명학을 실천하는 사람이 생겼다.”

-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중심 이데올로기였다. 당시 양명학은 어땠나.

“조선시대는 고려시대 가르침인 불교를 누르고 유학을 높이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폈다. 이때의 유학은 바로 주자학이었다. 새로 건국한 나라의 사상을 위해 기초를 놓은 학자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는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사상을 비판하고 마음 기운 이치(心氣理)라는 글로 도가와 불가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유학은 천리를 중시하는 정통으로 높였다. 도가는 기운(氣)을 중심으로 하는 기학(氣學)이고 불교는 마음을 강조하는 심학(心學)이라고 폄하했다. 중종과 선조 때 양명학이 들어오자 양명학을 불교의 심학과 같다며 이단으로 배척했다. 주인공은 퇴계 이황이었다. 숙종, 영조시대에 하곡 정제두는 스승과 친우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명학도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聖學)이라면서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비공개적인 가학(家學)으로 계승돼 정인보에까지 이르렀고 비로소 양명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쇄국정책을 펴면서 정통적 주자학을 지키고 불교와 천주교는 사악한 것으로 배척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펼쳤다. 따라서 양명학은 이단으로 간주해 햇빛을 보지 못했다.”

- 양명학의 시각으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고 해결 방안은.

“코로나19가 창궐해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적으로 이미 선진국이라고 칭찬받고 있다. 의료제도나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 시민의식이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는 이를 계기로 한층 더 높은 문화를 이뤄내야 한다. 코로나 사태에서 선거를 치른 우리나라를 모두 칭찬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의 정치의식은 이번 선거에서 동서로 완전히 갈라졌다. 정치적 이념(이데올로기)과 감정으로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진 결과다. 양명학은 고정된 이데올로기를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역동적 철학이다. 정해진 원리(定理), 어떤 틀에 갇힌 것을 제일 싫어한다. 양명학은 굳어진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중시하므로 문제가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코로나 이후에 세계질서는 아주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성숙한 태도는 더 높은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 바로 양명학적 사고다. 주자학은 수직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국가주의 유학이라면 양명학은 수평적 질서를 존중하는 시민사회에 알맞은 유학이다.”

- 양명학이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양명학을 미리 실천한 환경에서 공부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속이지 않는 무감독시험을 쳤다. 저의 모교(제물포고)의 교훈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었다. 양심은 바로 양명학의 양지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타이완에서 맹자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양명학의 연원이 맹자심학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이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태도를 중시했지만 양명학은 수평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귀중하게 여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기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해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찾아가는 태도로 수업했다. 가정에서도 아내와 딸들에게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지 한 번도 야단친 적이 없다.”

- 제자인 최진석 교수가 전남 함평에 ‘胡蝶夢家(호접몽가)’를 짓고 ‘새말 새 몸짓’ 운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감회가 어떤가.

“최 교수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고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 서강대 교수직을 그만두려고 할 때 내게 와서 상의했다. 처음엔 말렸지만 뜻이 너무 굳어 큰일을 하려는 가보다 생각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참 어렵다. 노장적인 삶을 실천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는 것을 삶과 일치시키는 최 교수의 염원은 바로 함평 나비축제로 유명한 고향의 호접몽가에서 펼칠 것이다.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새말’은 새로운 사유와 앎이고 ‘새 몸짓’은 바로 거기서 나온 행동이라고 본다. 이것은 내가 전공한 왕양명의 지행합일과 맥이 닿는다. 내가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최 교수는 이 땅의 지성계를 이끌어갈 철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함평은 ‘호접몽가’로 인해 한국의 철학을 이끄는 명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 정인재 교수는.

- 중국 흑룡강성 출생(79).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77년 타이완 중국 문화대에서 맹자 심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 귀국 후 영남대, 중앙대, 서강대에서 철학과 강의
- 한국양명학회 회장 지냄
- 2010년 강화에 하곡학 연구원 세움
- 현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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