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첸 칸(쿠빌라이)은 누구라도 칭기스칸의 빌리크를 가장 잘 지키는 자가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같이 말하면서 코코친 카툰은 빌리크를 낭낭하게 암송하는 테무르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 물론 그 때문에 테무르에게 대칸의 자리를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미 테무르는 지지세력 등에서 대칸에 자리에 오를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송정벌군 사령관이었던 바얀(伯顔)이 테무르를 지지하고 있던 것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테무르의 형인 진왕 카말라(晉王 甘麻刺)는 제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아 동생에게 대칸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래서 대칸의 자리에 오른 테무르는 ‘울제이투 칸’ 즉 ‘행복한 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국식 묘호는 성종(成宗)이었다.
쿠빌라이가 사라진 대원제국은 가장 먼저 카이두의 표적이 됐다. 두려워하던 쿠빌라이가 이미 죽었으니 오래 동안 기다렸던 카이두로서는 일전을 겨룰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더욱이 테무르는 할아버지 쿠빌라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카이두로서는 공격만 하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전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뜻하지 않았던 사태까지 벌어졌다. 쿠빌라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체제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따돌림 받았던 사람들에게 카이두는 적절한 피난처였다. 말하자면 쿠빌라이 덕분에 카이두는 세(勢)를 불릴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제 쿠빌라이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 사람들은 카이두에게 몸을 위탁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더욱이 쿠빌라이 체제아래서 도시생활의 단 맛을 봤던 그들로서는 유목생활이 지겨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297년, 뭉케의 손자, 울루스부카와 아릭부케의 아들 요부쿠르를 비롯한 세 명의 유력자가 만 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대칸 테무르에게 투항해왔다.
테무르는 이들을 환영한 것은 물론 너무도 기쁜 나머지 연호까지 고쳤다. 하지만 카이두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대로 두면 오히려 내부가 무너지면서 중앙아시아 왕국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모든 것을 잃은 카이두
테무르의 형으로 일찍 죽은 다르마발라(答刺麻八刺) 아들인 카이샨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전투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카이샨은 나중에 대칸이 되는 무종(武宗)이다. 자연히 전세가 이내 역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쿠빌라이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오래 동안 기반을 다져 남겨 놓은 군의 조직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원제국의 3대 왕가가 모두 이 전투에 참가했다. 게다가 나얀의 반란 때 위력을 떨쳤던 투르크인 친위부대가 최전선에서 이번에도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 동방 3왕가까지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참가했으니 가히 초대형 진용이라고 할 만 했다. 카이두는 처음 몇 곳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만 결국 대원제국의 대 군단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 하나가 된 대몽골제국
대원제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두아는 차파르를 설득해 대칸 테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가 드디어 대원제국의 체제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 종착점으로 가는 팍스몽골리카
쿠빌라이가 기반을 다져 놓은 대몽골제국은 다음 대에 와서야 비로소 전 몽골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원제국을 종주국으로 일한국과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이 연합하는 이 체제는 이때부터 60년가량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