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국의 서역 신강자치구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이 그들이다.
중국은 지금 소수민족들의 이탈 움직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중국 서쪽의 위구르인들과 티베트인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중국 당국의 갖가지 탄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며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차이를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존재 때문이다.
신강 위구르인들의 분리 독립 운동은 티베트인들의 그 것보다 훨씬 폭력적이라는 점에도 차이가 있다.
위구르인들은 지난해인 2016년만 해도 몇 차례의 테러로 자신들의 분리 독립 의지를 보여줬다.
2016년 9월의 폭탄테러로 신강지역 공안부국장을 비롯한 경찰 세 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다쳤다.
또 한달 뒤인 2016년 10월에는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폭탄을 실은 승용차로 돌진해 자살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지난 2014년에는 시진핑 주석의 방문에 때맞춰 우루무치에서 폭탄테러를 감행하고 2009년에는 대형유혈사태로 수 백 명이 숨지는 등 수 십 년째 테러 저항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싱크탱크 뉴 아메리카 2016년 보고서는 중국 출신 IS(테러단체 이슬람국가) 요원이 118명인데 그 가운데 위구르 자치구 출신이 114명으로 중국 당국의 박해가 그들의 IS 가입 동기라고 밝혀서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처절하고 힘든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위구르인들이다.
그런데 과거 13세기 가장 먼저 칭기스칸을 찾아가 스스로 나라를 헌납하며 신하되기를 자처한 나라도 위구르이다.
많은 세월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의외의 일이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위구르왕국 신하되기를 자청
위구르인들이 스스로 신하가 되기를 자청하고 나선 것은 칭기스칸이 내부정비를 통해 대몽골의 모양을 갖춰 가던 1209년이었다.
그 때도 위구르인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중국의 신강 지역 근처에 살고 있었다.
"구름이 개어 어머니이신 태양을 본 듯, 얼음이 풀려 강물을 얻은 듯 칭기스칸의 명성을 듣고 몹시 기뻤습니다. 허락하시어 황금 띠의 죔쇠라도, 진흥옷의 자투리라도 얻는다면 대칸의 다섯째 아들이 돼 힘을 드리겠습니다."
▶훌륭하게 적중한 위그루의 도박
위구르의 왕을 이디쿠트(idi-qut 赤都護)라 부른다.
위그루 이디쿠트는 몽골측이 이를 수용하자 1211년 직접 금, 은, 진주, 비단 등 공물을 가지고 칭기스칸을 찾아와 신하의 예를 갖췄다.
사위로 삼은 것이지만 이후 몽골제국 안에서 위구르인들의 위상을 보면 실제로 칭기스칸의 다섯 번째 아들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위구르는 몽골고원 바깥쪽에 있는 민족들 가운데 칭기스칸의 지배권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당시 대몽골 제국이 갓 출범한 시점이었고 동쪽에 금나라가 건재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구르의 선택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위구르는 과거 몽골 초원을 한 세기 동안 장악했던 민족으로 비록 투르크 계통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몽골과 동질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당시 거란족이 세운 서요(西遼)라는 카라키타이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그 보다는 몽골 초원을 장악한 칭기스칸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위구르인들의 저항은 종교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그 때는 그런 요소가 없었던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말하자면 냉정하고 치밀한 계산 끝에 선택한 도박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위구르의 이 도박은 훌륭하게 적중해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몽골제국 안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몽골 고원 1세기동안 지배
위구르는 한 때 몽골 고원을 장악했던 유목민족이었다.
원래 몽골고원을 차지했던 東돌궐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위구르는 744년 東돌궐제국이 망하면서 그 대체 세력으로 등장해 몽골 초원을 1세기 정도 다스렸다.
수도는 카라발가순에 자리하고 있었다. 카라발가순은 과거 흉노와 돌궐의 칸들의 거처가 있었고 후에 대몽골제국의 수도가 되는 카라코룸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 오르콘강 근처의 카라발가순 지역에는 옛 위구르 제국의 성터가 남아 있는 것을 카라코룸 방문했을 당시 직접 볼 수 있었다.
▶마니교 믿으며 문화적 소양 높여
이곳을 수도로 삼은 위구르제국은 돌궐과는 달리 이웃 중국의 당(唐)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으로부터 수도 장안을 탈환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당시 당나라를 도운 뒤 낙양에 머물렀던 위구르의 칸 등리모우는 마니교 선교사들과 접촉한 뒤 몽골초원으로 돌아갈 때 이들을 데리고 가 마니교로 개종했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터교 (拜火敎)에서 파생돼 나와 기독교와 불교를 접합시킨 이 종교는 교조의 이름을 따 마니교라고 불렀다.
엄격한 도덕적 계율을 내세우는 이 종교는 발생지인 이란과 이라크에서 박해를 받아 쫓겨났으나 예기치 않게 위구르 제국의 국교(國敎)가 되면서 다시 환생한 것이었다.
동서양의 문화와 종교를 접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마니교는 무엇보다 위구르들의 문화적인 소양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몰락 후 투르판 근처에 위그루왕국
바로 이러한 문화적 소양이 몽골 문자를 만들어 내고 칭기스칸 시대 몽골인들의 교사로 행정가로 발탁돼 몽골인들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는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야만적인 요소를 버려 가는 과정에서 위구르들은 힘을 잃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몽골지역에서 밀려난 그들은 지금 중국의 감숙성 일부지역과 투르판과 쿠차, 우루무치 지역 등지에 정착하면서 위구르왕국을 세웠다.
▶몽골제국의 두뇌집단으로 기여
동서의 문화가 교차하고 여러 나라의 정보가 집중되는 곳에 자리 잡은 위그루 왕국은 종교도 불교로 개종하고 작지만 영향력 있는 나라로 성장해왔다.
바로 그 위구르 왕국이 칭기스칸의 대몽골제국이 출범하자 신하가 될 것을 자청하며 찾아온 것이었다.
칭기스칸에 이은 역대의 몽골 군주들은 특히 위구르 인을 대거 행정에 기용했다.
오랜 국제 교역 경험과 고도의 문화 능력을 배경으로 그들은 율법, 행정, 재정, 조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화폐 정책, 조세 징수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고대 몽골어는 1940년대 몽골이 러시아 문자인 끼릴 문자를 빌려 지금의 표음문자로 사용하기까지 7백 년 동안 몽골의 언어가 됐다.
지금도 몽골의 관청의 간판이나 공식문서에서 이 문자를 자주 볼 수 있다.
위구르 인들은 몽골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으면서 그들의 문화를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널리 침투시키고 위구르 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결과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