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대통령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작년 12월 9일부터 올해 3월 10일까지 대통령은 권한정지 상태였고, 촛불은 계속 타올랐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3월 10일부터 5월 9일까지 대통령 자리가 비어 있다. 비상시국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느낀 점 몇 가지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시스템에 관한 얘기다. 청년들은 ‘헬조선’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국가운영 시스템이 비교적 우수하다는 점이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한 번 더 검증했다. 그 결과를 국민들이 다시 받아들이고, 대통령이 없는 기간에 ‘권한 대행’ 역할을 총리가 담당했다. 그러나 나라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세 번째는 헌법에 관한 얘기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들이 헌법 공부를 많이 했다. 필자도 헌법을 읽어보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경제민주화 논쟁이 한창 일었던 몇 년 전에 ‘헌법 119조 1항과 2항’을 들춰본 적이 있다. 그리고 요즘에 다시 헌법을 들여다봤다.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더불어 1조 2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은 노래 가사가 됐고,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요즘 서점가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전한 책들이 헌법 관련 책들이다.
헌법 얘기를 마저 하자면 다른 많은 조항 중에서도 우리 국민들이 꼭 읽어봐야 할 조항이 바로 ‘복지’를 뒷받침하는 헌법 34조다. 국민들이 국가에 사회보장과 사회복지 서비스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가 되기 때문이다. 헌법 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34조 2항 ‘국가는 사회보장과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해야 한다’ 등 1항에서 6항까지를 보면 여성, 노인, 청소년, 장애인, 건강, 은퇴, 실업, 재해 등의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과 복지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충분하게 해주고 싶어도 나라가 가난하고 예산이 부족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 규모는 세계 11위 수준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가깝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클럽에 가입한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가 못사는 나라는 아니다. ‘복지와 성장 중 양자택일해라’, ‘복지 예산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복지 병에 걸려 나라가 망한 경우를 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곤란하다. 복지국가이면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달성하고,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는 나라가 많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는 물론이고 독일,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도 그렇다.
“복지와 분배를 통해서도 성장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진보정당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한국은행 총재도 이런 얘기를 하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도 얘기한다. 세계은행, IMF(국제통화기금), OECD 등 국제기구에서도 ‘포용적 성장’을 얘기한다. 소득격차가 너무 벌어지면 오히려 성장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신자유주의’를 열심히 주장했던 IMF, 세계은행 등도 복지지출을 늘려서 격차를 줄이고, 경제주체들이 더 신나게, 더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결국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대선 정국에서도 일자리, 복지,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이젠 그냥 경제, 그냥 성장이 아니라 어떤 경제, 어떤 성장이냐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