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태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릴리'로 잘 알려진 시린 오사파논(20·사진)씨가 한국예술종합학교(총장 김봉렬)에 입학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사파논 씨는 올해 이 학교 음악원 기악과에서 아시아 우수 예술인재(AMA, Art Major Asian Scholarship) 장학생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는 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장학생으로 수학한 데 이어 한국에서 '최우수성적 입학'이라는 명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오사파논 씨는 "장학 프로그램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한예종과 한국 정부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한예종 음악원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나를 지도해줄 김남윤 교수는 최고의 바이올린 스승"이라며 자신이 4년간 머무를 곳에 평했다. 그는 열여섯 살, 바이올린을 한창 '공부'하던 때 태국의 유명 법대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한예종을 알고 난 후 '이곳에서 공부할 수 없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주변에 선언했을 정도였단다.
그가 공부해 왔던 미국, 일본 등에서도 전통과 실력을 겸비한 음악학교들이 많았을 텐데 유독 한예종에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2년 전김남윤 교수의 마스터클래스를 들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김 교수는 열심히 연습하고 연주할 수 있도록 힘과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 온 후 한예종 학생들과 영재교육원 학생들이 갖고 있는 놀라운 재능을 보고 놀랐다"며 "미래의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나 위대한 솔로이스트가 될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오사파논 씨는 다섯 살이 채 되기 전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태국 외곽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매주 왕복 6시간 이상이 걸리는 방콕 바이올린 수업에 그를 데려다 줘야 했다. 그는 "이 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알지도 못한 채 우연히 음악을 시작하게 됐지만, 바이올린은 곧 내 인생의 전부가 됐고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꿈을 갖게 됐다"며 웃었다.
바이올린 세계에 입문한 그가 처음으로 진지한 고민을 했던 것은 아홉 살 무렵,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였다. 그는 "음악의 세계가 얼마나 큰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며 "나는 당시 내 연주 실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대회에 참가한 다른 나라 학생들을 보며 크게 뒤처져 있음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혼돈을 겪고 있던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포기할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였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태어난다. 머리는 하나, 손은 두 개 이렇게. 그러니 다른 학생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주먹을 꼭 쥐었다.
오사파논 씨는 지난해 한예종 음악원 신입생이 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와 김 교수, 김성숙 조교의 지도 아래 하루하루 즐겁게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다 같은 해 10월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됐고, 잠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가 바이올린 공부를 계속할 수 있던 것은 왕립 장학금 등 아둔야뎃 국왕의 지원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둔야뎃 국왕의 애민정신을 본받아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가진 연주자, 내가 가진 재능을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가가 되고자 마음먹었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태국과 미국, 한국을 잇는 바이올린 여정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의 시선은 어려운 가운데 꿈을 잃지 않는 어린 학생들을 향하고 있다.
"잠재력 있는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돌이켜 보면, 저는 행운도 많이 따랐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태국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 가면서, 어린 나이에 홀로 외국에서 어둡고 힘든 날도 많았습니다. 어린 학생들, 특히 혜택을 받지 못 하는 곳의 훌륭한 학생들이 더 좋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약관의 나이임에도 그가 왜 '바이올리니스트 릴리'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게 됐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