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개정 신중해야] "투기자본 먹잇감" vs "삼성전자 먹는 데 55조"

2017-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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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서동욱·김정호 기자=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내 상장기업을 투기자본 먹잇감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반면 삼성전자 1곳만 먹잇감으로 삼으려 해도 55조원이 들고, 이런 규모로 외부 자본이 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22일 금융투자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는 상법개정안 가운데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제외하고, 전자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 두 건만 이달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상법 개정에서 핵심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여야간 입장 차이가 너무 크다. 이를 허용하면 외국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재계를 중심으로 들끓고 있다. 반면 이런 우려는 정경유착 폐해를 낳아 온 재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억지라는 목소리도 거세다.

◆"소버린 사태 되풀이할 것"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두 명 이상 선출할 때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요청하면 주총에서 투표를 실시해 표를 많이 얻은 순서대로 이사를 선출하는 것이다. 1주당 뽑을 이사 수만큼 투표권을 줘 선호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다. 현재는 후보별로 각각 찬성, 반대 투표를 진행하는 단순투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주총에서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사내외이사와 별도로 뽑아 대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도록 하는 게 골자다.

재계는 2003년 '소버린 사태'를 되풀이할 것이라며 두 제도에 모두 반대한다. 이 사태는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을 대량 매입해 2대주주로 등극한 뒤 경영진 퇴진을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소버린은 사외이사 추천이나 자산 매각, 주주배당을 요구하기도 했다. 소버린은 소액주주와 노조, 시민단체와 연계해 SK그룹 최태원 회장 퇴진을 비롯한 대기업 개혁도 주장했다. SK그룹은 가까스로 경영권을 방어했지만 소버린은 9000억원이 넘는 투자차익을 챙겼다.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지분율이 높지 않은 외국계 헤지펀드도 연합을 통해 특정 인물을 이사로 선임, 경영진에 투입시킬 수 있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단기에 수익성을 극대화한 후 빠져나가는, 전형적인 '기업사냥'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도 맥락이 비슷하다. 이 제도는 감사위원 선임 단계부터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 제도 도입에 반대하는 측은 "외국 투기자본이 지분 쪼개기(3% 이하), 펀드 간 연합을 통해 감사위원 자리를 장악해 경영에 간섭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이를 의식해 전날 "현재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경영권 방어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획재정부는 경영권 방어제도로 포이즌필과 차등의결권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이즌필은 우호적인 주주에게 싼값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적대적인 인수합병을 막는 제도다. 차등의결권제는 경영진이 보유 주식에 비해 더 많은 의결권을 갖도록 한다.

◆"견제 없이 정경유착 못 끊어"

상법 개정을 찬성하는 쪽은 "외국인 투자자에 의해 경영권이 침해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경제개혁연대는 최근 논평에서 "투자 목적이나 패턴이 서로 다른 외국계 자본이 연합해 단일하게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며 "외국인 주주 대부분은 경영참여에 소극적이고 경영진이 제출한 주총 안건에 반대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근거로는 헤지펀드 엘리엇이 꼽힌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했던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 주총을 앞두고 다른 외국인 주주에게 의결권대리행사를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외국인 주주 지분 33% 가운데 합병에 반대한 규모는 22~23%에 그쳤다. 직접적인 재산상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도 외국인 주주 간 연계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삼성전자 주식을 5% 이상 소유한 단일 외국계 주주도 현재 없다. 해외 자본인 캐피탈리서치앤매니지먼트컴퍼니(5.03%→3.96%)와 캐피탈그룹인터내셔널(5.29%→4.77%), 더풋남어드바이저리컴퍼니(5.18%→4.11%)가 한때 5% 이상 지분을 보유했지만, 2008년 이후 모두 5% 미만으로 줄였다.

이에 비해 삼성그룹 총수 일가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약 19%에 이른다. 해외 자본이 20% 이상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을 위협하려면 전날 주가를 기준으로 약 55조원이 필요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55조원에 달하는 자본이 연대하기도 어렵고, 가능하더라도 이를 법적으로 막는 장치를 만든다면 주식시장이나 기업공개(IPO)가 존재할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상법 개정으로 긍정적인 견제가 늘 것으로 기대하거나, 반대로 부정적인 간섭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경영권을 위협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5%룰'도 무분별한 경영권 공격을 줄여줄 수 있다. 이 제도는 시장 투명성을 키우고, 적대적인 인수합병을 방어하기 위해 도입됐다. 5%를 초과해 보유한 지분에 한해 일정 기간 의결권 행사가 제한된다.

금융당국은 엘리엇을 5%룰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파생상품인 총수익스와프(TRS)를 악용해 몰래 지분을 늘렸다는 것이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는 "외국에서 경영권 방어제도는 신생 기술성장기업을 위한 것"이라며 "충분히 지배구조를 개선할 시간이나 자본을 가지고 있었던 대기업까지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인 구글이나 알리바바도 차등의결제도로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더비와 허츠, 아메리칸어페럴은 포이즌필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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