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노승길 기자 = 한진해운 사태에 따른 물류대란이 한국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을 흔들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에 넓게 퍼져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미 산업 구조조정이 예견됐음에도 관료집단 보신주의가 사태를 키운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일이 커지자 부랴부랴 대처에 나선 것도 늘상 봐오던 정부의 무능한 모습이다. 기업과 금융권,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 구태와 기업 노조, 이익 단체의 우는 소리에 정치권이 목소리를 높여 여론에 올라타는 것도 여전했다. 한국경제의 방향타 역할을 해야 하는 국책연구기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예견된 산업 구조조정인데 관료집단 보신주의 사태 키워
이번 물류대란은 관료가 책임질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미루는 '관료집단 보신주의'가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해운경기 악화가 눈에 보이고 경영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데도, 수년간 실질적인 구조조정을 미루다가 상처가 곪아 터지자 오히려 사태를 키우고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이번 한진해운 법정관리의 파장이 커지게 된 것은 선제적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이라며 "사태가 악화하기에 앞서 구조조정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손에 피를 안 묻히기'를 바라다보니 기회를 놓치고 사태를 키웠다"고 비판했다.
특히 국책은행이 주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채권단이 구조조정 원칙을 지킨다며 한진해운의 지원요청 거부 결정을 내린 것은 한국 기간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
금융당국의 통제를 받는 국책은행이 지원불가 결정을 내린 것은 결국 '서별관회의 청문회' 등을 의식해 책임을 회피한 결과라는 평가다.
또 법정관리에 따른 물류 혼란이 예견된 상황에서 주요 항만 등을 중심으로 정부가 실태를 파악한 뒤 시장에 미리 시그널을 줬다면, 화주가 미리 선사를 바꾸는 등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크다.
◆ 컨트롤타워 있으나 마나…부처 간 엇박자 여전
지난달 31일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소식에 정부는 부랴부랴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결정에 따른 경제적·산업적 영향 최소화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컨트롤 타워를 자임한 기재부는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금융 및 물류를 포함한 국가경제 차원에서 이해관계를 검토하고 법정관리에 따른 물류 대책을 해양수산부가 마련하도록 당부했어야 하는데,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며 '모르쇠'로 일관한 것이다.
물류산업을 책임지는 국토교통부나 해운산업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 역시 수개월간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가능성이 거론되는데도 관전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한진해운 선박 압류 등 물류 혼란이 현실화되자 정부는 지난 4일 해수부에서 운영 중인 비상대응반을 '관계부처 합동대책 태스크포스(TF)'로 확대 개편하고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지만 이후에도 엇박자 행보는 여전했다.
지난 5일 기재부와 해수부가 불과 1시간 격차를 두고 가진 브리핑에서조차 입을 맞추지 못했다. 오후 2시 브리핑을 한 기재부는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하거나 나랏돈을 지원하는 방안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1시간 뒤 해수부는 "발이 묶인 한진해운 화물을 풀어 주기 위해 최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는 공익채권을 한진해운이 법원에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시장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 여론 편승한 정치권…존재감 없는 국책연구기관
정치권의 여론 올라타기 행태도 여전했다. 정치권은 한진해운 사태로 '물류대란'이 심각해지자, 관련 업계와 이익 단체의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관련 업계와 이익단체들은 국내 1위 선사인 한진해운이 이 지경까지 가도록 정부는 뭘 했냐는 질타와 함께 우선 정부가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정치권은 정부와 한진해운의 무능과 무대책을 성토하며 대책 마련 촉구에 열을 올렸다. 물류대란 확산 전에 국민의 세금을 함부로 쓰지말라고 지적하던 일부 정치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경제의 방향타 역할을 해야 하는 국책연구기관은 존재감조차 없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는 6일 발표한 최근경제동향을 통해 "한진해운 법정관리가 수출 물류를 일부 제한할 수 있겠으나, 해운업 전반의 공급 과잉을 고려할 때 부정적 영향은 단기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평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주무부처인 해수부 산하의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역시 법정관리 신청 후에 '해운위기 대응 태스크포스'를 가동, 선제적인 움직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한진해운이란 기업뿐 아니라, 한국 정부에 대한 항의와 반발이 거세다"며 "한국 해운업과 수출업은 신인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만회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