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4]남북교역 중단 불구 대외무역 성장

2016-07-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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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4)

제3장 재계활동 - (39) 앵도환의 억류(抑留)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화신무역(和信貿易)은 회원 상사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내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제1차 무역선(貿易船) 앵도환(櫻桃丸)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화신무역은 두 번째 무역선을 띄울 만반의 조처를 취할 정도였던 것이다. 즉 경제협조처(ECA, 미국의 대외원조기구)를 움직여 화신무역은 남북교역(南北交易)의 티켓을 따냈다.

박병교(朴炳敎) 사장이 홍콩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사주(社主)인 박흥식(朴興植)
과 중앙교역(中央交易) 사장 김정도(金正道, 박흥식의 매부) 간에 대북 교역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국영 무역회사인 조선교역공사(朝鮮交易公司)의 대표와 중앙교역 김기정(金基政) 전무가 물자교역의 상담을 진행시켜 갔다. 박병교 사장이 홍콩에서 돌아왔을 때는 조선교역공사의 대표가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박병교 사장은 그간의 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어딘가 석연찮게 느껴져 물었다.

“북쪽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주와 사주의 매부가 진행시킨 일이므로 정면으로 가로막고 나설 수는 없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던 임영신(任永信)은 뒤에 앵도환(櫻桃丸) 사건에 대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박흥식씨는 ECA와 손잡고 면화·생고무·가솔린을 북으로 보내는 대신 이남으로 비료를 가져오겠다는 제의를 해오므로 나는 생고무·가솔린이란 전략물자여서 한사코 반대했다. 박 씨는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의 허락을 간청했고 이 박사가 나를 불러 의견을 묻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니 이 박사는 자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각의(閣議)의 안건으로 정식 상정되지 않겠는가? 군정 때는 명태·오징어였지만 이제부터는 비료를 가져오게 된다는 제안 설명이었으나, 나는 선박과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비료도 절대로 들여오지 못하게 된다고 장담하며 반대하였으나 표결 결과 5대 6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장담은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 무렵 중앙교역의 김정도 사장이 조선우선의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를 찾아가 이북과의 교역을 위한 배 한 척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교역 책임은 박흥식과 자신이 지겠다면서 배만 빌려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공산당의 확약을 받기 전에는 그런 조처를 취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김정도는 다시 평양의 주무부처로부터 반드시 선박을 돌려 보내줌은 물론 최대한으로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서류를 받아왔다. 해촌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영업과장 최현진(崔現鎭)을 판문점을 통해 평양으로 보내 약속을 확인시켰다. 이러한 다짐과 함께 해촌은 미군정청의 의사까지 타진한 후 앵도환을 내줬다. 이리하여 앵도환은 교역물자를 싣고 인천항을 떠난 것이다.

그야말로 그간 중단되었던 남북교역이 재개되는 것 같았다. 무역협회 안에서도 모두가 모이기만 하면 화신무역의 남북교역 이야기였다.

앵도환은 중앙교역의 전무 김기정 인솔 아래 선원 9명이 승선하고 3000만원 상당의 물자를 싣고 12월말 경 부산항을 출항했다.

원산항에 들어간 앵도환은 싣고간 짐을 풀었다. 그런데 북한측의 조선교역공사는 약속한 비료 선적을 서두르지 않는 것이었다. 김기정 전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선원들까지도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맘 때 공교롭게도 남한에서는 1945년 1월 8일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설치되어 친일반민족자(親日反民族者) 제1호로 화신산업(和信産業)의 박흥식 사장을 고발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북한측은 선적을 재촉하는 김기정에게 반민족 반동분자의 재산을 압수한다고 통고하고 선원까지 전원 연금시키기에 이르렀다. 얼토당토 않게 반민특위 사건을 내세워 재산을 압류하고 김 전무 이하 선원들을 연금, 앵도환은 자동적으로 압류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해촌은 앵도환이 압류되었다는 소식에 아연했다. 걱정했던 일이 적중하고 만 것이다. 그들의 문서상이나 구두 확약이 어떤 효력을 가질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저질러진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배는 찾아와야 되겠다고 해촌은 발버둥쳤다. 그러나 앵도환의 압류를 계기로 남북간의 분위기는 급속히 악화되어 이북에는 들어갈 수도 없게 됐다.

애만 태우고 있던 어느 날 조선교역공사의 사장이 홍콩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해촌은 지체없이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가 홍콩에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도 어디에 거처를 정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해촌은 무역협회 출범 당시에 협회 이사로 있다가 홍콩에서 대북 무역(對北 貿易)을 맡고 있는 김승식(金承植)을 구슬려 가까스로 조선교역공사 대표를 만날 수는 있었다.

“같은 민족끼이 이런 배신 행위를 해서야 되겠소?”

하고 김승식을 통해 이북 대표를 상대로 따졌다. 그는 해촌의 말에 일일이 동감을 표시하면서도,

“우리 이북은 내 마음대로 되게 안 되어 있수다. 당신의 얘기를 상부에 보고해서 최선을 다하겠소”하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북괴는 선장과 기관장을 비롯한 선원만을 모두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앵도환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앵도환 사건으로 조선우선은 외항선 한 척을 잃었고, 화신무역은 엄청난 물자를 날렸으며 이로써 중앙교역은 파산했다.

상대를 믿을 수 없는 교역이라면 선수입 선수출(先輸入 後輸出)을 생각했음직 하고 이미 신탁선적제(信託船積制)가 실시되고 있던 때이므로 외국 은행의 중개 또는 감독을 받는 장치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인데, 경험부족에서 온 초기 무역의 대가치고는 이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희생이었다.

이와 같은 개척 회사들의 희생을 딛고 초기 무역은 급성장해 갔다. 회원 상사들의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협회는 수출대상품 업종단체와의 접촉이 활발해져 갔다. 한국수산업회(韓國水産業會), 한국한천제조수산조합(韓國寒天製造水産組合), 한국해태수출조합(韓國海苔輸出組合) 등이 그 대표적인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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