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에 따르면 창업주의 32주기 기일이지만 별도의 추모행사는 개최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주 선대 회장과 함께 일했던 일부 원로 임원들이 묘소가 있는 충남 공주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들은 고인 앞에 오너 공백에 따른 비상경영체제 상황인 그룹의 위기극복을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엔 김승연 회장이 선친의 선영을 참배하고 가족모임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올해는 재판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현암 김종희 회장은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사업을 통한 보국 일념으로 기업을 일으킨 김종희 회장은 국가 근대화를 위해 기간산업을 우선순위에 뒀다. 화약산업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 일제 침략기와 6·25 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다이나마이트 국산화, 아시아 최대 화약 메이커 도약 등 성장을 이끌었다. 또 김종희 회장이 직접 그룹을 지휘한 1980년까지 한화는 석유화학산업과 기계산업 등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중화학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1981년 59세의 이른 나이에 선대 회장이 별세하고 29세의 약관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을 승계받자 주위의 걱정이 많았지만 한화그룹은 우려를 씻고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적자 상태인 한양화학을 인수해 흑자전환에 성공하는 등 김승연 회장의 M&A 전략이 빛을 발해 한화는 현재 석유화학, 기계, 금융, 건설, 레저·유통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김 회장이 선대 회장에게서 물려받을 당시에 비해 2011년 회사의 총자산은 135배 증가했다.
특히 김승연 회장은 한화의 ‘제2 창업’을 선언하고 미래성장동력인 태양광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활발하게 추진해왔다. 지난해 80억달러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프로젝트 수주는 김 회장이 현지 정부와 협상을 주도하는 등 발품으로 이룬 쾌거였다.
하지만 장남 없는 창업주 기일 만큼이나 이례적인 장기간의 오너공백 상황은 한화에 부정적이다. 비상경영체제를 전격 가동하고 있지만 한화의 신규 사업은 추진력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추가 수주가 기대됐던 이라크 사업은 불투명해졌으며 오너의 결단이 필요한 태양광 등 신사업 투자는 정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