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이었던 당시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낙후한 데다가 정치·사회적으로도 극도의 불안감이 감돌던 시기였던 만큼 베이징에서의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첫 해에는 단신 부임했지만 그 이듬해 가족들이 베이징에 합류했다. 1989년 그는 베이징 현지에서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사망과 대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톈안먼 사태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의 당시 목격담은 아직도 한인사회에 전설로 남아 있다.
휘청거리던 중국은 이내 안정을 되찾았고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규모 투자가 진행됐다. 베이징 수도공항 제2터미널이 들어서고 베이징~톈진 고속도로가 완공되고, 베이징 북쪽지역에 야윈춘(亞運村)이라는 고급주거단지가 들어서는 등 현재 베이징의 틀이 잡힌 게 이때라고 한다.
1992년이 되자 쌍용·두산·코오롱 등 종합상사의 주재원들이 하나둘 베이징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한·중수교가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언제 체결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해 8월 양국은 전격적으로 수교를 선언했다.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이 베이징에서 교민 만찬을 할 때도, 수교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환영만찬을 할 때도 그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다.
그의 일은 사우나나 목욕탕에 기름보일러를 납품하는 것이었다. 경동보일러의 제품은 효율이 좋고 튼튼해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그의 현지 영업력은 탁월했다. 심지어 선양(瀋陽)의 목욕탕은 모두 경동보일러의 제품을 사용했다고 한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한파가 닥쳤다. 환율이 오르자 현지의 국제학교 학비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당시 베이징한국투자기업협회 부회장이었던 그는 앞장서서 한국학교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권병현 주중대사는 국제학교 설립을 위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고, 이건희 회장은 자금지원을 직접 지시했다. 1998년에 만들어진 한국 국제학교는 당시 학생수 48명이었지만 지금은 1300명으로 부쩍 늘었다.
1998년 중국내 소비가 부쩍 늘면서 기름값이 두 배가량 뛰었다. 기름보일러의 수요가 급감했다. 이미 전국에 200개의 대리점들을 설립해 뒀는데 이들의 아우성이 빗발쳤다. 그래서 박 회장은 중국에서 최초로 온돌사업을 시작했다. 주로 조선족 교포들과 한국인들이 대상이었다. 떨어진 보일러의 매출은 온돌이 상쇄시켰다. 2005년 경동보일러를 떠난 그는 서브웨이 프랜차이즈업을 시작했다. 점원들의 서비스품질을 올리기 위해 그는 급여체계를 매출연동제로 바꿨다. 장사가 잘되면 월급이 많아지는 구조로 바꾸자 매출이 급격히 신장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건축설계업체인 DA의 중국법인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이력 △1958년 1월 경남 사천 △진주고 △부산대 경제학과 △1984년 LG종합상사 입사 △1988년 LG종합상사 베이징 주재 대표 △1993년 LG종합상사 생활용품부 △1995년 베이징경동보일러 부총경리 △1996년 베이징경동보일러 총경리 △2005년 베이징 서브웨이 동사장 △2011년 DA그룹 건축설계 베이징법인 법인장 △2012년 베이징한국투자기업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