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고문은 수 년째 파킨슨병을 앓아온 데 이어 지난달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한달만에 숨을 거뒀다.
김 고문 측은 “뇌정맥혈전증의 근본적 치료가 안 되고 폐렴, 신장염 등 합병증까지 겹치면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다”고 밝혔다.
김 고문의 임종을 지켜본 이인영 전 최고위원은 “아름다운 별이 졌지만 김근태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고 말했습니다.
서울대 재학중이던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받은 것을 시작으로 재야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그의 청.장년 시절은 민청련 사건·전민련 활동 등으로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했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인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경감 등에게 무려 10차례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가 투병한 파킨슨병은 고문 후유증에 따른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95년 당시 민주당 부총재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한뒤 이듬해 15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3선에 올랐으나,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 당시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고 “아름다운 꼴찌를 기억해달라”며 경선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좌절을 경험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오랜 동지이면서도 정책 등에서 이견이 있을 때 ‘할 말은 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거치며 개혁성과 탁월한 논리력을 겸비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는 진보세력까지 포함하는 민주세력 대연합을 시대적 과제로 삼아 통합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내년 총선에서 재기를 모색해왔다.
유족은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한 부인 인재근 씨와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