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좌는 외로운 자리다. 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자리다. 대통령 측근은 국정운영의 부담을 덜어줬고, 대통령 라이벌은 ‘권력의지’를 강화시켰다. 대통령 퇴임과 동시에 잊혀지거나 혹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한 이들의 행보를 들여다봤다.
정치적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정치인들은 무한 경쟁을 벌인다. 때론 정치적 라이벌들과. 군부정권에서도 문민정부에서도 집권당내 권력다툼은 지속됐다. 역대 대통령의 라이벌들은 집권기간 초반 ‘협력자’에서 집권 후반기 ‘경쟁자’로 변모했다. 반대로 경쟁자에서 협력자로 남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을까.
1980∼90년대 여권을 주무른 김윤환 전 민주국민당 대표의 별명은 ‘영원한 킹메이커’다. 6공화국과 문민정부 탄생에 기여했던 그는 정권 재창출을 놓고 현직대통령에 맞서 미래 대통령을 만든 1등 공신이었다. 1979년 고향 선배인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으로 정계입문한 김 전 대표는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정무1수석 등을 거치며 중앙 권력의 장으로 들어간다. ‘킹메이커’기질은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세상에 드러난다.
김 전 대표는 그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경북고 동창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반노태우’ 세력을 견제하며 노 대통령의 구세주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내에서 소수파인 ‘민주계’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 1992년 대선을 9개월 앞둔 14대 총선에서 210여석의 민자당은 과반 의석 획득에 실패한다. 이에 당내에선 ‘민정계’ 박태준, 박철언, 이종찬 의원 등이 ‘김영삼 책임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민정계에서 노태우 직계에 이어 최대 계파를 거느렸던 김 전 대표는 대구·경북 의원들에게 “김영삼 이외에 누가 야당에 맞서 대통령을 할 수 있냐”는 소위 ‘대안론’을 펼치며 김영삼 정부 탄생에 일조한다.
그러나 15대 대선에선 이회창 후보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킹메이커로서 3승 고지를 노렸으나 ‘DJP’(김대중·김종필)연합 역공에 정권창출에 실패했다. ‘타협과 조정의 명수’로 3김 시대를 풍미했던 김 전 대표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 탈락을 계기로 급격히 무너진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표에게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을 결행, 신상우. 이기택. 김상현 의원 등과 민국당을 창당해 경북구미에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노장은 결국 정치복귀를 하지 못한 채 2003년 말 신장암으로 그의 호 ‘虛舟(빈배)’처럼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김영삼 정부= ‘영원한 2인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총재는 김영삼 정부 시절 최고 권력자의 최대 정적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재의 밀월기간은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면서 3당합당한 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할때까지였다. 박철언 전 의원에 따르면 1990년 1월19-20일 민주정의당(노태우)통일민주당(김영삼)신민주공화당(김종필)은 민자당으로 3당 합당을 추진키로 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각제 개헌을 1992년 총선전까지 실현한다’는 내용을 합의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내각제 약속을 사실상 폐기했으며 1993년 초대 민자당 당직개편때부터 최형우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기용하면서 민주계의 약진이이어지면서 군출신이나 5.6공 세력은 당직에서 배제됐다. 김 전 총재가 당시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김 전 총재는 1994년 말 벼랑끝에 몰리게 된다. 그해 12월13일 최형우 내무장관은 “내년에는 큰 변화가 있으며, 당대표제는 필요없는 것 아니냐”며 ‘김종필 대표 2선 후퇴’론에 불을 지폈다.
자신을 세계화에 부적합한 인물로 몰아 여론몰이식으로 물러나게 하려는 당내 움직임에 불만을 품은 김 전 총재는 다음해 2월9일 민자당을 탈당한 뒤 5월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시 ‘충청도 핫바지론’(충청권 홀대를 비유한 말)을 들고 나오면서 그해 6·27 지방선거에서 4명 광역단체장과 23명 기초단체장을 배출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 바람은 1년 뒤 15대 총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한다. 이 여세를 몰아 김 전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내각제 개헌과 연립정권’을 조건으로 DJP연합을 결성, 김대중 정부를 탄생시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김 전 총재의 탈당과 관련, “김종필씨의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내 본심을 전했다면 오해가 풀렸을 것”이라며 “그의 탈당은 지금까지 나의 정치 역정 가운데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
김 전 총재는 지금 병마를 이겨내는 중이다. 2008년 말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자택과 재활센터를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올 초 “집 근처 수영장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물속을 100m쯤 걷는다. 빙빙 돌면 1㎞쯤 된다. (쾌유하는 데) 2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동지이자 라이벌’ 김상현 민주당 상임고문
1970년 1월24일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뉴서울호텔에서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같이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싸워 나갈 것”이라며 7대(1971년) 대선 도전을 공식선언했다. 그의 대권출마 결심을 굳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김상현 민주당 상임고문이다. 당시 신민당 의원이던 그는 ‘승산이 없다’며 포기하려던 김대중 의원에게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설득한다. 김대중 의원은 이듬해 7대 대선에 신민당 후보로 나서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94만여표 차로 패하며 야권의 지도자 반열에 오른다.
이처럼 ‘김대중-김상현’ 이들은 깊은 동지적 관계였지만 또 한편으로 라이벌이었다. 때문에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김 고문은 아무런 직책을 받지 못했다. 장관으로 입각하지도 못했고, 집권당의 당 대표는 물론,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요직에 한번도 기용되지 못한 것이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이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과 분열했을때 그는 평민당에 합류치 않았다. 야권후보단일화에 매진하다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밀었다. 이후 2당 합당에 반대해 14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 측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당내 민주화를 요구하며 김대중 노선과 갈등을 빚으면서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등 동교동계 가신그룹의 견제에 시달려야 했다.
김 고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멀어진 계기는 1997년 5월19일에 열린 제1야당 새정치국민회의 전당대회때다. 그해 12월에 치러질 대선 후보 및 당 총재를 선출하는 이날 대회에서 김 고문은 김 전 대통령에 맞서 당 총재 경선에 출마했다. 또 대권후보로 나선 정대철 의원을 지원함으로써 김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났다는 의견이 많다.
김 고문은 이와 관련,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총재에서 물러나시고) 당 총재는 경선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며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내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회고했다.
김 고문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순탄한 정치인생을 보내지 못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심사에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우상호 후보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는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16대 국회에 등원하겠다”며 김윤환이 이끄는 민국당에 참여해 전국구 후보 2번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지지를 선언하며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뒤 광주 북구 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17대 총선에선 분당한 열린우리당 후보에 패해 다시 야인생활로 돌아갔다.
2007년 기획부동산업자 김현재씨에게서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노무현 정부= ‘동지에서 적으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국민경선 지킴이’로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 최고위원이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장관을 할때나 열린우리당 의장을 할때 청와대 참모들에게 “그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우라”며 각별히 챙겼다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회고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2005년 북핵 위기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200만㎾ 전력과 식량 50만t 지원의사를 밝히고 곧이어 6자회담 참가국의 9·19 공동성명까지 이끌어내는 등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2007년 정 최고위원은 민주세력대통합을 놓고 열린우리당 탈당 문제로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이들의 인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해 6월18일 그는 우리당을 탈당하면서 노무현 정부 차별화 노선의 선두에 섰다. 노 대통령도 17대 여당 경선과정에서 ‘이해찬-한명숙-유시민’ 등 친노(친노무현) 후보를 지원하면서 정 최고위원을 견제했다.
결국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530만표 차로 낙선하고 만다.
정 최고위원은 “난 노무현정부와 차별화를 하거나 대통령과 나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며 “다만 사회양극화 등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랬다고는 생각한다”고 했다.
현재 정 최고위원은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 등 진보진영과의 ‘원샷’ 대통합을 추진하면서 그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다. 그의 한 측근은 “민주진영의 대통합이 없는 한 대선 후보가 돼도 승산이 없는 것 아니냐”며 “무조건 한나라당과 1대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여당내 야당’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17대 대선 후보 경선때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극한 대립을 벌였다. 2007년 본격적인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고 박근혜는 이명박의 부패 비리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BBK 주가 조작 사건 등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2008년 18대 총선 과정에서 ‘친박’(친박근혜)계를 상대로 한 ‘공천학살’을 계기로 박 전 대표는 여당내 야당으로 활동한다.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세종시 수정 논란이 불거진 2009년 10월31일 박 전 대표는 부산에서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 전 대표는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앞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 그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용산참사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했다.
이제 박 전 대표는 그간 정부 견제의 입장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여권을 이끌며 대선레이스를 벌일 태세다. 지난 5월 원내대표경선과 7·4 전대에서 친박진영은 소장·중진그룹과 연합해 친이(친이명박)계를 당내 권력지형의 변방으로 몰아냈다. 이제 박근혜 역할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친박계 한 의원은 “지난 6월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을 통해 정권재창출의 큰 목표에 합의한 상태”라며 “내년 총선 지원은 물론, 서서히 여권 유력주자로서의 역할을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