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량에 민감한 상추나 시금치, 무 등 엽채소류 가격이 고공행진을 기록하면서 주부들의 장바구니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일각에서는 상반기 물가상승세를 주도했던 공급측 불안요인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기요금과 일부 공공요금 인상이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하반기에도 물가대란이 예고되고 있다.
◆'물폭탄'이 '물가폭탄'으로…농산물 작황 '부진'
지난 26일부터 28일 오전 11시까지 누적 강수량은 서울 530mm, 동두천 658.5mm로 그야말로 기록적인 수준이다. 기습 폭우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농작물 작황 부진과 출하량 감소다.
28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의 일일 소매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 27일 가락동 도매시장의 얼갈이 배추 반입량은 10㎏짜리 그물망 기준 108t에서 69t으로 급감했다.
강원도 태백이나 정선 등 배추산지는 상대적으로 비가 적게 와서 영향을 덜 받았지만, 일반 배추의 대체식품으로 사용하는 얼갈이 배추 산지는 주로 경기도에 몰려 있어 피해가 컸다는 것. 얼갈이 배추는 경기도 포천과 남양주, 일산, 용인 등지에서 주로 재배한다.
KREI의 한 관계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경기도 쪽에 있는 산지들이 피해를 많이 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특히 얼갈이 배추 쪽은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장기간 비가 오면서 얼갈이뿐만 아니라 파, 배추, 상추, 시금치, 무 등 채소류 가격도 크게 올랐다.
파(1㎏)는 지난달 29일 1단에 1400원에서 지난 27일 1800원으로, 같은 기간 배추(2.5㎏)는 980원에서 1850원으로, 상추(100g)는 590원에서 1670원으로, 시금치(400g)는 590원에서 1710원으로, 무(1.5㎏)는 1400원에서 1750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민준 농협하나로클럽 도매분석팀장은 "상추, 열무, 얼갈이, 청경채, 쑥갓 등은 만약에 장마 이후에 폭염이 온다면 3주에서 한 달 이상 가격 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사과와 배 등 과일 가격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추석(9월 12일)이 지난해보다 10일 정도 앞당겨지는 등 8년 만에 가장 빨리 찾아오면서, 농산물 공급 부족에 따른 물가상승도 우려된다.
추석에는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게 마련인데 농산물 작황 부진까지 겹쳐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배 가격은 개당 2970원에서 지난 27일 3980원으로 1000원이나 올랐다. 대표적인 제수용품으로 쓰이는 배를 3개만 사도 1만2000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서민 체감경기가 악화하면 내수경기 부진으로 이어져 경기 자체에도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KREI 관계자는 "추석이 열흘이나 당겨졌는데도 불구하고 물량은 적고 출하시기도 늦춰질 것으로 예상되는 등 악재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농수산물 가격이 상승세를 보이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장마와 폭염, 집중호우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점을 꼽았다.
봄까지만 해도 냉해가 없고 작황이 좋았지만 기후상황이 악화하면서 작물이 자라는 데 나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긴 장마와 연이은 폭우로 과일 품질이 크게 저하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국내산 '미숙과'가 많아지면 소비가 위축될 수 있다는 것.
특히 국내산 과일 소비 위축은 수입산 과일 등 대체과일 구입을 증가시키고 결국 소비자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KREI 연구원은 "이번 폭우는 과일 주생산지인 경북이 아닌 중부지방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극심한 피해는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면서도 "대신 일조량이 확보되지 않아 색과 모양이 상당히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색과 모양이 미흡하면 '미숙과'로 분류되는데 당도가 떨어지면 소비자들이 2~3달간 소비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며 "따라서 수입산 과일 등 대체과일 수요가 증가하면서 소비자 신뢰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 적절한 대응책 마련 못하고 '전전긍긍'
정부는 서민물가를 잡기 위해 물가회의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긴 장마와 폭우로 인한 피해 개선에는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수산물 작황 부진으로 주부들의 장바구니 물가가 오른 데다가 정부가 전기요금을 평균 4.9% 인상하겠다고 밝히면서 서민들의 물가부담은 더욱 가중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재정부는 폭우 피해에 따른 농수산물 동향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수급대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이번 폭우가 '예견되지 않았던 악재'라는 점에서 정부 입장에서 물가관리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재완 재정부 장관도 지난 26일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물가는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 상인 등 모든 경제주체가 합심해 극복해야 한다"며 물가관리의 어려움을 시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