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민족문제는 공기와 같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그 중요성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사회문제로 불거질 때에는 비로소 그 중요성과 고귀한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를 관할하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의 양징(楊晶) 주임(장관급)은 2009년 신화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민족간의 단결을 공기에 비유했다.
최근 중국은 여러 차례 소수민족 문제를 겪었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티베트 유혈시위에 이어 2009년에는 위구르자치구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2011년에는 소규모 시위로 그치긴 했지만 네이멍구에서 민족간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중국당국을 잔뜩 긴장시켰다.
중국은 인구의 다수(91.52%)를 차지하는 한족과 나머지(8.48%)를 차지하는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인구는 적지만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64%에 이르며 이 지역에는 막대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소수민족들은 중국 중앙세력의 팽창에 따라 소외감을 느끼고 있으며, 작은 사건이라도 사회상황에 따라 민족차별로 받아들여져 거대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곤 한다.
때문에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고 있다. 소수민족 자녀에게는 대학에 들어갈 때 우대점수를 준다. 한족에게 엄격한 ‘1가구 1자녀 정책’도 소수민족은 예외다. 정부차원에서도 국무원의 부총리자리 한석을 소수민족에게 배려하고 있다. 현재는 회족인 후이량위(回良玉)가 부총리에 올라가 있지만 후이량위는 내년이면 나이제한에 걸려 은퇴할 예정이다.
이 자리를 두고 전철수(全哲洙, 조선족) 중공통일전부 부부장, 바터얼(巴特爾, 몽고족) 네이멍구 자치구 주석, 마뱌오(馬飇, 장족) 광시(廣西)장족자치구 주석, 왕정웨이(王正偉, 회족) 닝샤(寧夏)회족자치구 주석 등 소수민족 고급관료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양징이 가장 앞서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소수민족 자치구, 신중국 있었기에"
양징은 몽고족 출신으로 드물게 한화(漢化)한 이름을 쓰고 있다. 몽고족인만큼 양징은 네이멍구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해 네이멍구 자치구 주석위치까지 올라갔으며, 지난 2008년부터는 소수민족을 관장하는 민족사무위원회의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의 커리어 전체가 소수민족과 맞물려 온 것이다.
민족사무위원회는 신중국이 설립된 후인 국무원의 규정에 따라 1949년10월 만들어졌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집행하고 소수민족과 소수민족지구의 경제, 정치, 교육, 문화, 과학기술 등 업무의 발전을 촉진하며 소수민족의 합법적인 권익을 보장하고 사회주의 민족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수호하며 각 민족 공동번영을 실현하는 중요한 임무를 짊어졌다. 1970년 문화대혁명에 의해 위원회는 해체되었지만, 1978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복귀되었다.
그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그는 “신중국 설립초기 제거해야 했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민족차별이었다. 이에 신중국은 민족이 자치하는 지방정부를 세워 민족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각 민족이 평등한 신분으로 국가의 주인이 되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1947년 네이멍구자치구가 설립됐으며, 신중국이 설립된 후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닝샤회족자치구, 광시장족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가 설립됐다. 민족 자치는 명확하게 헌법에 명기돼 있다”고 소개했다.
또한 양징은 “지난 60년동안 여러방면에서 볼 때 소수민족은 중국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집단 중 하나”라며 “소수민족지역은 원시 혹은 반원시 상태에서 풍요롭고 진보적인 사회로 발전했고, 경제발전 입장에서 말하자면 개혁개방 이래 소수민족 지역 GDP는 몇 십배 혹은 수백배의 신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8년 중국 소수민족 지역 GDP 총량은 3조위안을 돌파했고, 도시 주민 일인당 가처분소득과 농촌 주민 국민 평균 순소득은 약 30년동안 30.8배 19.2배 증가했다”고도 덧붙였다.
◆27세에 중국어과 입학
양징은 1953년 12월 네이멍구 준거얼치(準格爾旗)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던 1970년부터 1974년까지 네이멍구자치구 준거얼기의 농업기계 공장 노동자로 근무했으며 근무하는 도중 공장 주임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네이멍구의 공업학원 동력과에서 짧게 1년동안 공부했다. 이후 그는 준거얼치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양징은 준거얼치의 조직부에서 근무했다. 당시 그는 많은 한족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관료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980년 27세의 나이로 네이멍구대학 중국어과에 늦깍이 입학한다.
양징은 아직도 중국어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언어는 문화와 감정의 운송수단이며 소수민족 출신의 개인으로 말하자면 민족고유의 언어를 습득하는 동시에 중국어를 잘 하는 것은 강한 경쟁력을 의미한다”며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확장하고 더 큰 인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막힌 사고를 벗어나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졸업 후에 그는 네이멍구 이커자오멍(伊克昭盟)의 공산당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채용됐고, 1983년에 공청단 이커자오멍 서기를 맡았다.
◆3년간 네이멍구 공청단 서기
이후 그는 네이멍구 이커자오멍 다라터치(達拉特旗) 부서기, 서기를 지냈다. 이 곳은 징기즈칸의 유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38세인 1991년에는 네이멍구자치구 중앙정부에 진출해 통계국 부국장을 맡는다. 네이멍구의 작은 도시들을 떠돌던 그의 생애에서 첫번째 전환점이었다. 2년 후에 그는 또 자치구 관광국 국장으로 승진한다 .
그러던 그에게 1993년 인생의 두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공청단 네이멍구자치구 위원회 서기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공청단 중앙 제1서기는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였다. 그는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리커창과 교분을 쌓았으며, 이로 인해 그는 훗날 승승장구하게 된다.
3년간 공청단 서기로 근무한 양징은 네이멍구 저리무멍(哲里木盟) 서기로 이동한다. 1998년에는 네이멍구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 서기로 옮겨갔다. 후허하오터시는 네이멍구자치구 인민 정부 소재지였으며 몽골 초원의 교통중심지다. 양징은 이 곳에서 제1인자로서 리더십을 발현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중국 공산당의 16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소수민족 출신 엘리트 정치인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네이멍구 지역발전 이끌어
2003년4월 51세의 양징은 네이멍구자치구 인민정부 주석을 맡게 된다. 중국에서는 각 자치구의 해당 지역 권력서열 1위인 서기는 한족이 맡고 인민정부 주석, 인대(人大) 상무위원장, 정협 주석 등을 그 지역의 소수민족이 맡는다. 소수민족으로서 자치구에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인민정부 주석인 셈이다.
양징의 발탁은 그해 1월에 공청단 출신의 멍쉐눙(孟學農)을 베이징 시장에 임명한 데 이어 3개월만에 나온 후속조치였다. 이로 인해 양징이 공청단파 인사라는 사실과 후 주석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양징이 자치구 인민정부 주석이던 시기의 네이멍구는 상당히 빠른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2006년의 네이멍구의 GDP는 4790억위안에 달했다. 1947년의 5.37억위안보다 196배 늘어난 수치다. 특히 양징은 네이멍구에서 ‘자원에 의탁하면서도 자원에 의지하지 않는' 정책을 사용했다. 자원개발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후 첨단기술산업을 네이멍구에 안착시키겟다는 것. 현재 비자원형 산업이 네이멍구의 공업에서 점유하는 비중은 이미 40%에 접근해 있다.
이밖에 양징은 균형발전을 추구했다. 우선 후허하오터, 바오터우(包頭), 어얼둬쓰(鄂爾多斯) 등 세곳을 경제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이 세곳의 경제총량은 네이멍구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이와 함께 네이멍구 동북지역의 발전을 적극 추진했다. 2004년 양징은 대규모 대표단을 거느리고 러시아, 몽골을 방문했다. 약 30개의 계약을 체결했다.
양징은 국무원으로부터 지난 2006년 8월 자아비판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중앙정부의 비준 없이 30만KW의 발전소 2기를 지었다는 이유다, 발전소의 건설 중단도 지시받았다. 네이멍구 자치구는 중앙 정부의 허가없이 2004년 4월 발전용량 화력발전소 건설안을 허가했었다. 하지만 공산당 중앙은 양징을 부서기에 연임시켰으며, 2008년에는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베이징에 불러올려 그에 대한 신뢰가 여전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