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 하는데 왜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을까. 성장의 과실(果實)을 정부와 기업이 대부분 가져갔기 때문이다.
기업의 매출이 올라도 고용이 늘거나 근로자의 급여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물가상승과 소득양극화로 근로자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실제로 국내총생산(GDP)이 1970년 191조원에서 2007년 975조원으로 5배나 늘어나는 사이 가계의 저소득층 비율은 7.6%에서 14.4%로 두배 증가했다.
가계를 꾸린 근로자의 경우 소비가 소득을 추월하며 빚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으며, 20~30대의 젊은 직장인의 경우 부모세대로부터 이전소득이 없다면 저축·결혼·출산·육아 등 미래를 위한 투자가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이 같은 현상은 1990년대 이후 두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며 더욱 심화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가계소비 및 저축률 하락으로 이어져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
◆ '치즈' 독식한 정부와 기업
"소위 '괜찮은' 일자리가 늘지 않아요. 그만큼 대기업이 고용 확대에 인색하다는 의미죠." 한 민간 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10년간의 일자리 동향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경제성장에 따른 기업 매출 증가에도 기업들은 고용 및 임금 개선에 인색한 모습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경영기조가 '확대'에서 '안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 자료에 따르면 자산 5조원 이상 기업집단 55곳의 평균 매출은 22조6000억원으로 전년대비 17.7% 증가했다. 당기순이익도 전년보다 60.2%나 늘어 평균 1조4900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이 기간 종사자 300명 이상 사업장의 취업자 수는 198만5100명에서 195만2000명으로 3만1000명 감소했다. 기업의 매출 증가에도 신규 고용창출에는 소극적이었다는 의미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1월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중 265곳을 대상으로 올해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체 채용인원은 지난해보다 3.7% 줄어드는 등 기업매출 확대와 일자리 증가는 더 이상 비례하지 않는 양상이다.
고용이 위축되고 임금증가가 정체되며 경제성장의 파이는 점차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총처분가능소득에서 수출기업이 포함된 비(非)금융회사가 벌어들인 소득의 비중은 2006년 12.8%에서 지난해 16.1%로 늘었다. 반면 개인의 소득 비중은 같은 기간 60.2%에서 57.5%로 줄었다.
한국경제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했다지만 실제로 기업·정부를 제외한 개인 부문의 1인당 총처분가능소득은 1만1891달러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소득의 57%에 불과한 수준이며, 금융위기 전인 2007년의 1만2703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체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노동소득분배율도 지난 2007년 61.1%에서 2008년 61.0%, 2009년 60.6% 등으로 낮아지고 있다. 그만큼 근로자에 돌아가는 몫이 줄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도 파이의 비중을 키우며 가계에 이중부담을 주고 있다. 정부 세수와 재정부담이 늘어남에 따라 각종 사회부담금을 가계에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원기 한은 조사국 팀장은 "일자리 창출이 더딘 상황서 국민연금 등 가계의 사회부담금이 늘다보니 취약계층의 소득분배 구조가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기업이 노동 절약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나섰고, 정부가 가계의 경직된 소비 규모를 늘리며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 빚에 억눌린 가계
고용 및 임금 증가가 제한된 상황서 가계의 빚은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가계부채는 795조원으로 전년 말보다 7.8% 증가했다. 가계부채는 지난 2009년 2분기 이후 7분기 연속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국가 전체 부의 총량이 4~5%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빚이 소득보다 2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도 153%에 달한다. 이는 미국(128%)·영국(161%)·일본(135%) 등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도 높은 수준이다.
가계부채의 양 뿐만 아니라 질도 떨어지는 추세다. 가계대출이 주로 생활비 조달을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자산가치 하락 및 금리인상기에는 충격이 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거주하는 김대영(68, 자영업)씨는 최근 생활비 조달을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김씨의 소득은 앞으로 계속해서 감소할 테지만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은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상환능력은 떨어지는데 자산을 담보로 한 대출은 앞으로도 가능해 실질적인 대출의 질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부동산경기가 침체를 거듭하고 있지만 가계의 주택담보대출이 꾸준하게 늘어난 점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2007년 3분기에서 부터 2008년 2분기까지 2~5%대로 늘어나던 주택담보대출은 2008년 3분기 7.2%, 4분기 8.1% 증가한 뒤 지난 2009년에는 10.2%, 2010년 7.7%의 가파른 증가율을 기록했다.
◆ 성장 잠재력 후퇴 가능성도
가계의 소득감소와 부채증가는 소비여력을 줄여 결국 내수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우석훈 경제학 박사는 "한국의 저축률은 1970~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높았으나 현재는 오히려 오히려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며 "결국 개인이 보유한 자산이 없다는 뜻으로 내수가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17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최신 경제전망에 따르면 내년 이후 2016년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전 세계 184개 국가의 평균 성장률보다 낮을 전망이다.
한국의 성장률은 내년 4.2%, 2013년 4.2%, 2014년 4.0%, 2015년 4.0%, 2016년 4.1%로, 세계 평균 성장률 4.5%, 4.5%, 4.6%, 4.7%, 4.7%와 비교해 연도별로 최소 0.3%포인트에서 최대 0.7%포인트 낮을 것으로 예상됐다.
외환위기 이후부터 경제문제가 사회병리 현상으로 번지고 있는 점도 경제 성장세를 위축시킬 수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 한해 하루 평균 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년으로 환산하면 1만5330명으로, 7년마다 인구 10만명짜리 도시가 하나씩 사라지는 셈이다.
자살의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경쟁심화·구조조정·성장세 둔화·고용불안·가계부실·양극화 등 경제적 스트레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소득분배 상태를 나타내는 소득 10분위 배율(상위 10% 소득/하위 10% 소득)과 자살의 상관관계는 0.67로 밀접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적 스트레스가 사회문제로 불거질 경우 사회 전반의 활력 저하는 물론 무기력감 확산으로 경제 성장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자살에 따른 인구감소도 직접적인 경제둔화의 원인이 된다.
송태정 우리금융지주 수석연구위원은 "글로벌 임밸런스보다 국내적 불균형 극복이 먼저"라며 "가계 부문의 과도한 부채 문제 해결과 소득 및 고용 양극화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