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성환 기자)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30년을 맞았다. 강산이 3번 바뀌는 동안 딱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역대 최고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조오련이 빠르냐 바다거북이가 빠르냐?" 논쟁만큼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서로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고 응원하는 팀도 다르다. 이 글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른다. 그래도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았으니 논쟁거리를 한번 던져본다.▲ 선동열, 최동원, 송진우, 김용수, 류현진, 이상훈, 박철순, 장명부, 정민철, 정민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0위) ‘마지막 20승 투수’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1992~2008, 통산 124승 96패 3세이브 3.48)
2004년 FA대박을 터트리며 7억4000만원이라는 역대 투수 최고 연봉을 받았지만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2004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거둔 성적은 단 7승. 하지만 그때의 성적만으로 그를 평가절하 하기는 성급하다.
1996년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면서 그의 전성기는 시작됐다. 그해 15승을 시작으로 1997년 13승, 1998년 17승, 1999년 20승, 2000년 18승을 기록하며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서 평가를 받았다. 그 기간 동안 두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현대를 명실상부 1990년대 후반 최고의 팀으로 만든 것이다. 특히 1998년 한국시리즈에선 홀로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팀 창단 후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MVP에 선정됐다.
이후 2001년 일본 요미우리에 진출했지만 부진을 겪었다. 2003년 현대로 다시 복귀해 17승을 기록, 다승왕을 거머줬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선발로만 3승을 거두며 팀의 3차례 우승을 견인, 두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줬다. 현재는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코치를 하며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9위) ‘제2의 선동열’ 정민철(한화 이글스, 1992~2009, 통산 161승 138패 10세이브 3.51)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저평가돼 있는 선수는? 바로 정민철이다. 한국야구의 황금세대 92학번. 그중 빅3라고 불렸던 공주고 박찬호, 신일고 조성민, 휘문고 임선동 등 화려한 동기들 때문에 고교시절에는 빛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에서 선수 생활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조성민과 임선동이 각각 요리우리 입단 후 부상과 일본 다이에 입단파동으로 아픔을 겪고 있을 시기, 정민철은 빙그레에 데뷔해 첫해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92년 14승을 기록, 빙그레의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다. 이후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한국야구 에이스 중 한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99년에는 18승, 개인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팀의 창단 첫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2001년 요미우리로 진출했다. 일본 진출 첫 경기에서 완투승을 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다.
한국 복귀 후에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으며 부진을 겪었다. 150㎞를 넘던 특유의 직구도 없어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결국 그는 노련한 투수로 변해 팀을 이끌었다. 일본 진출만 없었다면 지금 송진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록을 갈아 치웠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8위) 장명부(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6, 통산 55승 79패 18세이브 3.55)
통산 55승 78패. 평범하다 못해 역대 최고의 투수 논쟁에 끼기도 민망한 성적이다. 그렇지만 그가 8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하다. 그의 기록은 앞으로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너구리’ 장명부. 그가 83년 기록한 30승은 한국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다승이다. 현대 야구에서 선발투수가 한 시즌에 나올 수 있는 경기수가 많아야 30경기라고 치면(사실 30경기도 되지 않지만), 모든 경기를 이겨야 거둘 수 있는 승수이다.
장명부는 83년 60경기에나 등판을 했다. 투구 이닝 수도 427.1이닝.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도 200이닝을 넘기는 투수를 보기 힘든데, 장명부는 무려 그 2배가 넘는 이닝을 던졌다. 그런데 평균자책점은 2.34로 결코 높지 않다. 지난해 방어율 2위를 기록한 김광현(SK)보다도 0.03 낮은 수치다.
그해 비록 삼미는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전기·후기리그 2위를 기록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1983년 팀이 기록한 승수가 총 52승. 팀 승리에 50% 이상을 차지했다. 장명부는 한국 야구 역사상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다시 나오기 어려운 투수다.
7위) ‘불사조’ 박철순(OB 베어스, 1982~1996, 통산 76승 53패 20세이브 2.95)
‘불사조’ 박철순. 올드 팬들에겐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이름이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24승을 기록하며 최초의 MVP에 오르게 된다. 그해 그가 기록한 22연승은 단일 시즌 세계기록이다. 이후 한국시리즈에서도 활약하며 OB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야구 최초의 챔피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기가 끝난 후, 병원으로 간 박철순은 선수생명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1982년, 36경기에 등판 무려 15경기나 완투한 박철순의 허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에 출전해서도 허리에 주사를 맞아가며 겨우 버텼다. 한국시리즈를 마치고 진단한 결과 그의 병명은 '허리 디스크'. 요추와 요추 사이에 끼어있는 물렁뼈가 튀어나온 상태였다.
이후로 끊임없는 재활과 복귀를 반복했다. 그가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도 바로 이 힘든 역경을 딛고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1995년은 불사조가 마지막 날갯짓을 한 해로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감독의 체벌에 못이긴 선수들이 1994년에 벌인 항명 사태로 내·외부적으로 팀이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하지만 박철순이 있었다. 만 39세로 팀내 최고참이던 그는 선수단을 추스르며 선발과 중간계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9승을 기록했다. 결국 그해 팀은 리그 1위를 기록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롯데를 4대3 접전 끝에 물리치며 13년 만에 팀의 2번째 우승을 만들어냈다. ‘불사조’ 박철순. 투수로서의 전성기는 1982년이나, 그에게 느껴지는 열정은 1995년이 전성기였다.
6위) ‘야생마’ 이상훈(LG 트윈스, 1993~2004, 통산 71승 40패 98세이브 2.56)
긴 갈기머리 휘날리며 마운드 위에서 강속구를 뿌려대던 ‘야생마’.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20승 왼손투수인 이상훈을 최고의 투수 중의 한명으로 뽑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시절 선배들에 체벌에 못 이겨 항상 숙소에서 도망치던 그에게 붙여졌던 별명은 ‘빠삐용’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그의 잠재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92년 봄, 성균관대를 상대로 14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면서 그는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해 LG에 입단하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단하자마자 '9승 9패 평균자책점 3.12'를 기록하며 야생마의 질주는 시작했다. 이어 94년에 18승, 95년엔 20승을 기록,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르며 한국최고의 좌완투수 반열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손가락 혈류장애'로 선발에서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했다. 1997년엔 47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하며 당시 구원 포인트 신기록도 작성했다. 병고의 역경에도 야생마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시즌 뒤 “해외 진출이 아니면 은퇴하겠다”고 밝히면서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에는 실패했고, 차선책으로 일본 센트럴리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 적응에 실패하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해에는 마무리 선동열과 함께 최강 불펜을 구축하며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만들었다.
다음해 그의 앞에는 많은 연봉이 보장됐지만, 그는 ‘야생마’라는 별칭답게 그의 오랜 꿈을 찾아 메이저리그로 떠났다. 하지만 벽은 높았다. 보스턴에 입단하며 도전했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결국 2002년 중간에 다시 LG로 복귀했다. 2002년은 이상훈 자신이 뽑은 최고의 시즌이다. 그해 7승 2패 17세이브를 기록하며 5위 두산과 2게임 차로 팀을 간신히 포스트시즌에 올려놨다. 그리고 LG에 역사적 포스트시즌이 시작됐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현대를 2승으로 꺾고 올라간 LG는 플레이오프에서 기아를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간신히 이기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LG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삼성이 가볍게 LG를 꺾고 우승을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현 SK와이번스 감독)과 선수들이 똘똘 뭉쳐 삼성을 거세게 몰아붙쳤다. 결국 6차전에서 터진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해 LG가 보여준 투지는 많은 팬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야생마’ 이상훈은 지금 록밴드를 하며 음악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유로운 야생마의 모습 그대로다.
5위) ‘괴물’ 류현진(한화 이글스, 2006~ , 통산 78승 36패 1세이브 2.76)
2006년 괴물이 등장했다. 류현진은 첫해부터 다승·삼진·평균자책점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다. 그해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7년과 2008년엔 각각 17승·14승을 거두며 한국 최고의 투수 대열에 들어섰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금메달을 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0년 시즌 또 다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특히 지난 시즌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6이닝 3자책 이하)를 기록함으로써 한국 야구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했다.
역대 최고의 투수라고 평가받는 선동열 전 감독도 류현진을 보고 “그 나이 때 나보다 훨씬 잘한다”는 극찬을 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국가대표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그가 더 기대가 되는 것은 아직 24살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진행형 괴물 류현진이 앞으로 써 내려갈 기록들이 기대된다.
4위) ‘노송(老松)’ 김용수(LG트윈스, 1985~2000, 통산 126승 86패 227세이브 2.98)
LG 팬이라면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 타자를 아웃으로 처리하고 만세를 부르던 그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LG의 마지막 우승. 마운드 위에는 ‘노송(老松)’ 김용수가 있었다. 100승-200세이브를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한 선수. ‘등번호 41’ LG트윈스 최초의 영구 결번. 227세이브로 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보유자. 그가 가지고 있는 최초라는 타이틀만 해도 여러 개다.
그를 최고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기록 때문만이 아니다. 선발과 마무리, 두 보직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프로야구 역사를 살펴봐도 선발에서 마무리로 성공한 적은 있어도, 마무리에서 선발로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데뷔 초부터 마무리로 활동하던 그는 팀 사정상 1997년 선발로 보직을 변경했다. 37살의 나이와 12년 이상을 마무리로만 활약했기 때문에 김용수의 보직 전환은 주변의 걱정을 낳았다.
그러한 우려도 잠시, 김용수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상황을 정리했다. 특히 1998년엔 18승으로 최고령 다승왕에 오르기도 했다.
2000년을 끝으로 은퇴한 김용수는 현재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 중이다. 몇 해 동안 마무리 걱정에 야구를 끝까지 마음 편하게 보지 못하는 LG의 팬들에겐 그리운 이름이다.
3위) ‘기록의 사나이’ 송진우(한화 이글스, 1989~2009, 통산 210승 153패 103세이브 3.51)
다승·이닝·탈삼진 등 좋은 기록에서부터 패·피안타·피홈런·볼넷 등 나쁜 기록까지 모두 1위인 투수. 43살까지 현역으로 활약한 ‘기록의 사나이’ 송진우가 3위로 선정했다. 그의 기록을 하나씩 열거해 보자.
* 210승, 프로야구 유일한 200승. 2위인 정민철이 160승이지만 그나마 은퇴했으니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 3003이닝, 역시 유일한 3000이닝 이상. 이 기록 역시 2위가 은퇴한 정민철(2394.2이닝)이니 몇 년간은 1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 2048탈삼진, 마찬가지로 유일한 2000탈삼진 이상. 1749탈삼진으로 2위에 있는 이강철 코치도 은퇴한 상태니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다.
이 기록들은 당분간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깨지지 않을 수도 있을 듯 하다. 특급 선수들은 해외진출을 할 테니 말이다. 또한 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단 11차례만 나온 노히트노런을 가장 최근에 기록한 선수다. 한국에서만 한국 야구를 위해 팬들을 위해 뛰어온 그는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 2009년 은퇴식에서 흘리던 그와 팬들의 뜨거운 눈물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2위) ‘무쇠팔’ 최동원(롯데 자이언츠, 1983~1990년,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2.46)
103승 74패. 기록만 놓고 보면 위에 있는 송진우나 김용수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10위에 있는 정민태와 비교해도 나을 것이 없다. 하지만 그가 8년간 뿜어냈던 아우라는 그들의 10년 이상보다도 더 진했다.
1984년은 그의 경력에 백미를 기록한 때다. 정규시즌 51경기에 출장해 27승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84년을 최동원이라고 기억하게 것은 한국시리즈에서의 활약 때문이다. 혼자서 4승을 쓸어 담으며 롯데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프로야구 역사 30년 동안 한 선수가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모두 거둔 것은 최동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선동열의 등장과 함께 ‘최동원-선동열, 누가 최고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승 1패 1무. 결과적으로 우열을 가리진 못했다. 최동원과 선동열 최고의 대결이자, 프로야구 최고의 명승부라고 평가받는 15회 무승부 경기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날 최동원이 던진 공은 209개. 선동열은 232개. 4시간 54분 동안 두 선수가 허용한 점수는 각각 단 2점. 그 경기를 현장에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뿐이다.
최동원은 선수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선수협을 결성하려다가 구단에 미움을 샀다. 결국 삼성 김시진과 트레이드되며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무쇠팔’ 최동원. 그의 와일드한 투구폼이 그립다.
1위)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해태 타이거즈, 1985~1999, 통산 146승 40패 132세이브 1.20)
예상했겠지만 1위는 선동열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한국에서 뛴 11년간 평균자책점 1.20. 16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그자 맞았던 홈런은 고작 28개.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 0.80. 말 그래도 ‘언터처블(untouchable)’이었다.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것만 5차례. 그 중 1995년 기록한 0.49의 평균자책점은 단일 시즌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오죽하면 “선동열이 몸을 풀면 상대편이 짐 쌀 준비를 한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만큼 선동열이 뿜어냈던 아우라는 실로 대단했다.
1988년부터는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해태가 4연패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있던 동안 해태는 무려 6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언제나 승승장구했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96년 일본 진출 첫해 평균자책점 5.50과 단 3세이브만을 기록하며 2군에까지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첫 번째 좌절이었다.
와신상담. 그는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다음해 38세이브 1.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일본야구마저 평정했다.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삼성을 우승시키는 등 성공적인 감독생활까지 이어갔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 게임을 지배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선수였다.